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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 사로잡은 왕언니들의 전성시대

어리고 미숙한 것들은 가라. 지금 위풍당당한 여왕님들께서 행차하신다. 바야흐로 세계 영화계는 실버 파워의 바람을 만끽하고 있다. 보톡스로 피부를 탱탱하게 만들지 않아도, 지방흡입수술로 환상적인 S라인을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우아한 이들. 깐깐한 아카데미위원회마저도 이에 화답하듯 올해 여우주연상 부문에 세 중년 배우 주디 덴치, 헬렌 미렌, 메릴 스트립을 나란히 후보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더 퀸>의 ‘엘리자베스 여왕님’ 헬렌 미렌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바쳤다. 노련함의 대명사인 헬렌 미렌(62), 70대 나이가 무색하게 파워풀한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는 주디 덴치(73), 영화감독들의 천국을 만들어주고 있는 메릴 스트립(58), 따뜻한 지성미의 표본 다이앤 키튼(61), 해독할 수 없는 마력의 소유자 글렌 클로스(62). 다섯 왕언니들의 봄을 축하하며, 이 기사를 바친다.

헬렌 미렌 Helen Mirren (1945~)

여전히 섹시한, 언제까지나 당당할

대표작_<햄릿>(1976) <칼리큘라>(1979) <백야>(1985) <모스키토 코스트>(1986)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 <고스포드 파크>(2001) <캘린더 걸스>(2003) <레이징 헬렌>(2004) <엘리자베스 1세>(2005, TV) <섀도 복서>(2006) <더 퀸>(2006) <프라임 서스펙트: 파이널 액트>(2006) 등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헬렌 미렌에게 돌아갔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엘리자베스 윈저는 위엄과 헤어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이런 감격적인 수상소감은 40년 넘게 연기해오면서 마침내 연기의 여왕으로 인정받은 헬렌 미렌 자신을 향한 말일 것이다. 무엇보다 미렌은,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증명하듯, 언제까지나 당당할 듯한 섹시함이 빛나는 배우다.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의 무대에 서던 시절 그녀는 <트로일로스와 크리세다>에서 극 내내 거의 벗은 채로 무대에 서야 했던 크리세다를 연기했고,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는 고깃덩이들 사이서 불륜을 만끽하는 창녀를 연기했다. 미렌은 “살을 드러내는 게 잘 팔리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알몸을 보고 싶어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만 스스로 아름답지 않다면서 “멋지지 않은 걸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유명한” 배우라고 칭하기도 한다. “배우들은 건달이고 방랑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반항자를 꿈꾼다. 나쁜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좋은 여자 말이다.” 그녀가 정말 꿈꾸는 것은 “악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런던포트레이트갤러리에 전시된 그녀의 사진은 그녀가 동년배의, 이른바 ‘데임’ 칭호를 받은 영국의 쟁쟁한 여배우들 가운데 아직도 얼마나 관능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었다. 미렌은 2001년 <고스포드 파크>에서 영국 장원을 관리하는 하인 세계의 여왕 같은 하녀장 윌슨 부인을 연기해, 같은 영화에서 오만한 귀족 부인으로 출연했던 매기 스미스와 함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녀가 아카데미상에 대해 한 말이라고는 “엿 같은 것들 중 으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한 <더 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날 밤 역시, 미렌은 특유의 욕설로 악명보다 두터워진 명예에 약간은 투덜거렸을 것이다.

주디 덴치 Judi Dench (1934~)

견고한 위엄, 그 불가침의 아름다움

대표작_<007 네버 다이>(1997)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007 언리미티드>(1999) <초콜렛>(2000) <쉬핑 뉴스>(2001) <아이리스>(2001) <진지함의 중요성>(2002) <007 어나더데이>(2002) <오만과 편견>(2005) <007 카지노 로얄>(2006) <노트 온 스캔들>(2006) 등

“사람들이 대니얼 크레이그를 헐뜯는 게 불쾌하다. 치사한 짓일 뿐 아니라 역겹다. 나는 크레이그와 프라하와 바하마에서 촬영했는데, 그는 훌륭한 배우다. 그는 007에 새롭고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잘못된 것으로 결론날 것이다.” 007에게 M이 없었다면 아마 그 시리즈는 일찌감치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007인 대니얼 크레이그가 <007 카지노 로얄> 개봉 전 들었던 비판에 대해 어미닭처럼 나서서 방어하는 주디 덴치는 007 시리즈 속 M, 꼭 그 모습이다. 영국의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에서 그녀는 레이디 맥베스, 클레오파트라, 줄리엣 같은 주요 역할을 도맡았고, 1970~80년대 그녀가 주로 활약했던 연극무대에서 수많은 연기상을 받았다. 영국의 연극관객뿐 아니라 세계의 영화팬들이 그녀를 주목하게 만든 계기는 바로 1998년 출연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였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단 8분간 출연해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한 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는데, 단 8분간 출연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극 장악력과 존재감을 보여주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덴치는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병에 삶을 잠식당하는 이야기를 그린 <아이리스>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덴치는 다른 여배우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격한 눈매와 늘 웃을 듯 말 듯한 입매를 지녔지만, “유일한 후회가 있다면 아이를 더 낳지 않은 것”이라고 할 정도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고, 엄격함과 자상함의 백지장 한장 차이를 007시리즈의 M으로 잘 살려 보여주었다. “나는 연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충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연기하는 법은 스스로 터득해가는 것이다.”이런 연기관을 가진 그녀는 올해 <노트 온 스캔들>에서 보여준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메릴 스트립 Meryl Streep (1949~)

만점짜리 연기 답안지

대표작_<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 <소피의 선택>(1982) <실크우드>(1983)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영혼의 집>(1993)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디 아워스>(2002) <어댑테이션>(2002)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등

<소피의 선택>의 앨런 J. 파큘라 감독은 “영화감독을 위한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평생 메릴 스트립과 함께 일하는 곳”이라고 했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고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메릴 스트립은 눈 깜빡임 한번으로 희극과 비극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고 평가했으며, 다이앤 키튼은 “우리 세대의 천재”라고 칭송했다. 심지어 <실크우드>에 함께 출연했던 셰어가 메릴 스트립의 완벽한 연기에 치를 떨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 연기 우등생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다. 한번은 메릴 스트립이 할리우드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명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메릴 스트립은 내 뒤를 이을 최초의 배우”라며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메릴 스트립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배우다. 선배 배우들의 연기 패턴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개척한 감성 연기, 이것은 온전히 메릴 스트립만의 것이었다.

집 나간 여자(<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과거의 상처를 지닌 여자(<소피의 선택>), 침묵하는 아내(<영혼의 집>) 등 메릴 스트립은 꽤 오랫동안 희극보다 비극에 가까운 배우였다. 각종 상복과 비평가들의 찬사가 터져나온 것도 이 시기부터였지만, 주름살이 늘어서도 그녀의 행보는 근사하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을 비롯해 일련의 대중영화들은 메릴 스트립이 코미디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했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이르러서는 “역시 메릴 스트립!”이란 찬사를 끌어냈다. 꽉꽉 채우기보다 덜어내고 비워냄으로써 완전히 캐릭터에 동화되는 메릴 스트립. 이 여유있는 완벽주의자는 지금 <이브닝> <맘마미아> 등 수많은 차기작을 통해 영화감독들의 천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다이앤 키튼 Diane Keaton (1946~)

따뜻한 지성미의 표본

대표작_<대부>(1972) <애니 홀>(1976)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1977) <맨하탄>(1979) <레즈>(1981) <라디오 데이즈>(1987) <맨하탄 미스테리>(1993) <마빈스 룸>(1996) <지금은 통화중>(2000)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2007) 등

“60살인데 60살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나는 지금 61살이다. 내가 61살이 아닌 척해서 더 좋아질 게 뭐가 있겠는가?” 자신의 나이를 사랑하는 여자는 백발백중 멋있는 사람이다. 물론 다이앤 키튼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그녀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60살의 나이에 전신 누드로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 나이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탄사가 터져나올 정도로 그녀의 몸매는 탄력 있었지만, 사람들이 반한 것은 그녀의 S라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 속 다이앤 키튼은 연륜에서 우러나온 섹시함과 부드러움,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60대에 로레알 모델로 발탁된 것이 놀랄 일만은 아니다.

연기생활 초기, 다이앤 키튼은 시니컬하고 수다스러웠다. 꽤 오랫동안 우디 앨런의 뮤즈 자리에서 <애니 홀> <맨하탄> <라디오 데이즈> 같은 걸작들에 출연했는데, 특히 우디 앨런이 그녀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애니 홀(다이앤 키튼의 본명은 다이앤 홀이다) 캐릭터는 뉴욕 여자들의 워너비가 되었다. 우디 앨런과 함께한 빛나는 시대는 지났고,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다이앤 키튼이 주목한 영화들은 따뜻한 가족드라마가 주를 이룬다. 우디 앨런의 사랑스런 캐릭터나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등의 문제적 여성은 만나볼 수 없지만, 대신 다이앤 키튼은 영화에서 자기 나이대의 지혜로운 중년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 맨디 무어의 극성스런 엄마로 출연한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도 그 연장선에 있는 영화. 배우로서뿐만 아니다. 다이앤 키튼은 현재 두 아이를 둔 싱글맘이자 영화 제작자 겸 감독, 부동산 개발업자 등으로 활동하며 멋지게 늙어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다이앤 키튼이 현대 여성들의 워너비가 될 최적기일지도 모르겠다.

글렌 클로스 Glenn Close (1947~)

해독할 수 없는 마력

대표작_<위험한 정사>(1987) <위험한 관계>(1988) <영혼의 집>(1993) <화성침공><1996> <101 달마시안>(1996)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2000) <애니씽 엘스>(2003) <스텝포드 와이프>(2004) <스트립 서치>(2004) <춤스크러버>(2005) 등

글렌 클로스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프리슬리 역을 맡는 상상을 해본다. 흠… 사악한 편집장 역에 딱이겠군. 하지만 그녀가 메릴 스트립처럼 작은 입을 이죽거리는 모습은 왠지 떠올려지지 않는다. 강렬한 역할일지라도 메릴 스트립은 그윽한 와인의 느낌을 품고 있는 반면, 글렌 클로스는 치명적인 독주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섹스어필하되 여성스럽지 않고, 기품 있지만 예쁘다고 말하긴 힘들다. 아마도 전작들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일 텐데, 이 ‘위험한’ 여자는 20여년이나 지나서도 <위험한 정사>의 토끼 삶는 미치광이로, <위험한 관계>의 치밀한 요부로 기억되고 있다. 어느 여배우가 애정관계를 징그럽고 무시무시하게 그리고 싶을까마는 글렌 클로스는 악역에서도 약점을 찾아내 캐릭터에 최소한의 인간성을 불어넣는다. 이는 “아무도 맡지 않는 캐릭터일지라도 자신의 역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에서 비롯됐고, 또 5차례나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되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글렌 클로스에게 명성을 안겨준 역할들은 주로 까칠한 팜므파탈이었으나, 알고 보면 그녀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배우다. 브로드웨이 출신답게 연극과 노래에 능하고, 드라마와 TV쇼 등에서도 모습을 비췄으며, 저예산영화에서 월트 디즈니의 전체 관람가 영화 <101 달마시안>에 이르기까지 필모그래피도 폭넓다. 최근에는 메릴 스트립과 함께 찍은 드라마 <이브닝>의 촬영을 마쳤고, <테레즈 라퀸>이라는 범죄드라마에 출연하기로 약속한 상태다. 왕성한 활동 속에서도 그녀가 고수하고 있는 한 가지는, 여전히 세상과 호락호락하게 화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곱씹고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에서조차 비극성을 드러내는 매력. 아니, 마력. 세월이 흘러도 이 연기파 배우의 마력은 좀처럼 해독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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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R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