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그랜트는 재치있는 말을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답변을 듣다 보면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오락가락할 정도의 동문서답도 잘 하지만 상투적인 질문을 멋지게 만드는 우문현답 또한 그의 것이다. 휴 그랜트와의 이번 인터뷰는 가상인터뷰로, 지난 5년여간 휴 그랜트가 해외 매체들과 인터뷰하면서, 혹은 아시아 언론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에서 인터뷰하면서 실제 한 말들로 재구성했다.
-런던 시내에 집이 17채나 있다고 들었다. =새로 산 집마다 싫증을 느껴서 한채 한채 사 모으다 보니 런던에만 17채의 집을 보유하게 되었을 뿐이다. 한 동네에만 네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 그중 두채는 내가 사용 중이고, 다른 두채는 비어 있다. 다른 집들이 비면 집을 더 살 것이다. 거리 전체를 소유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것 같지 않은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의 다니엘 클리버가 실제 당신과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비슷한 취향에 비슷한 결함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음침한 영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생을 마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끼기는 한다. 만약 내가 조금 더 막 나간다면, 그러니까 내 취향을 다니엘 클리버식으로 밀어붙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가 싫지는 않다. 그처럼 솔직한 것을 좋아하거든. 속편 출연은 다니엘이 남의 등쳐먹고 사기나 치는, 그런 평면적인 악한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응하게 됐다. 원작자 헬렌 필딩하고도 친한 사이여서, 내 의견을 제시했고, 반영된 부분도 있다.
-플레이보이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런가? 난 몰랐다. 그렇다면 좋은 거 아닌가? 불편한 건 없다. (정착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제도 자체엔 회의적인데, 아이들에겐 부모가 있어야 하니까 결혼제도가 필요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나는 아기들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4분도 같이 있을 수 없다. 4분이 최대치라서, 그 시간이 지나면 왜 다들 애를 보면 좋아 어쩔 줄 모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어바웃 어 보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브리짓 존스의 일기> <투 윅스 노티스>의 플레이보이들은 모두 유형이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당신도 바람둥이인가. = 아니, 전혀 아니다. 루머나 스캔들에 별다른 의견이 없다. 내 의무는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의 공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쁜 기사가 나오면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내가 그걸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웃고 만다.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와의 연기는 어땠나. =줄리아는 정말 입이 크다! 대단히 큰 입의 소유자다. 굉장히 큰 입이다. 그녀와 키스신을 찍었을 때, 그녀의 입 안에서 희미한 메아리를 들었다.
-당신은 좋은 남자와 나쁜 남자, 극과 극의 캐릭터를 오간다. 좀 더 현실적인 역할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따지는 건 적절하지 않다. <러브 액츄얼리>의 영국 총리 역할은 지나치게 근사했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의 다니엘은 몹시 음흉했다. 하지만 이건 로맨틱코미디다! ‘진짜’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나 리얼리티 쇼를 보면 된다. 영화의 미덕은 사람들을 환상에 빠지게 하고, 즐겁게 해주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리얼리티는 그 다음 문제다. 나는 엔터테이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내 역할이다.
-다니엘은 브리짓을 사랑한 걸까. 실제 당신이라면 그런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겠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람에 따라선 브리짓을 섹시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고, 매력적인 점도 꽤 있으니까. 물론 다른 종류의 섹시함이긴 하다. 나 역시 통통한 여자들을 좋아하고, 그런 여자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술 취했을 때만 그러는 편이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남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다니엘은 브리짓의 외모에 대해 할 말이 꽤 많았을 거다. 나는 여자들이 공들여 치장하는 걸 좋아한다. 여자친구들 옷차림에 신경쓰는 편이다. 남자들이 잘 모르는 여자들의 외모 가꾸기 트릭 같은 것들은 모델과 오래 살면(엘리자베스 헐리) 저절로 알게 된다.
-당신은 파파라치의 타겟이다.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처하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야구모자를 쓰기도 했었는데 어울리지 않아서 그만뒀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건 물론 좋은 것이지만, 나처럼 오래 당하다 보면 발로 차주고 싶어진다.
-연기 생활을 오래 했다. 그 사이 연기관이나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느끼는가. =살아가면서 뭐가 가장 중요한지 계산하고 우선권을 두는 데 혼란이 온다. 아, 모르겠다. 정말. 생각이 자꾸 달라진다. 연기하면서 부와 명예에 대한 열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열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른 것들로 대체된 것 같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영국 총리를 연기했는데, 실제로 총리와 얘기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의 토니 블레어는 만나본 적이 없고, 존 메이저 총리가 주최하는 칵테일 파티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엄청나게 취해서, 총리에게 다가가서는, 당신은 실제로는 꽤 재미있는데 TV에서 보면 무척 지루해 보인다고 했더니 싫어하더라. 그리고 총리 회의실을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결국 경비원에게 쫓겨났다. <러브 액츄얼리> 때 참고하려고 <영국 헌정>이라는 책을 샀는데, 몹시 지루해서 네쪽인가 읽다 말았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춤추는 장면이 있는데, 특별히 춤을 배우느라 힘들지 않았는지. =아, 돈이 많이 들었고, 아직도 그 타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웃음) 몸으로 코믹한 연기를 하는 게 내 전공은 아니어서 정말이지 창피했고, 그 장면 때문에 갈등이 많았다. 커티스에게 제발 그 장면을 빼자고 계속 졸랐는데도 거절당했다. 굉장히 오랫동안 리허설을 해야 해서 그 장면을 찍는 데만 하루가 다 간 것 같다. 찍고 나서 TV 모니터로 보는 데 다들 웃었는데, 나한테는 아직도 충격이다. 그건 정말 내가 연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춤을 통해 자아를 표현한다고들 하는데, 나한테는 표현할 자아가 없는 것 같다. (웃음)
-<러브 액츄얼리>의 리처드 커티스와 오랫동안 같이 작업해왔는데, 이번에는 그가 감독을 맡아서 둘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점이 있는가. =관계가 악화했다. (웃음) 무서운 교장선생님같이 구는 감독들이 없어져서 이번에는 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커티스가 권력에 미쳐갔다. (웃음)
-일류 디자이너들이 자기 옷을 입어달라고 접근하는 일이 많은가. =일류 디자이너들이 접근을 많이 하긴 한다. 제발 자기네 옷을 입지 말아달라고.
‘말말말’로 기억되는 또 한 사람의 영국인: 사이먼 코웰
음정 하나하나에 각을 잡는 듯한 똑부러지는 영국 악센트는 말하는 사람을 지적으로 보이게도 하지만 보는 사람을 분통 터지게도 할 수 있다. 너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신인가수를 선발하는 미국의 쇼프로 <아메리칸 아이돌>의 심사위원인 사이먼 코웰은 ‘사람 열받게 하는 영국인’의 대표주자격으로, 세상의 온갖 무례한 표현과 싸가지없는 행동을 똘똘 뭉친, 하지만 그래서 인기있는 ‘재수없는 아이돌’이다. 1959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태어난 그는 <팝아이돌> <X팩터>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영국과 미국의 팝가수 선발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다른 두 심사위원인 랜디 잭슨과 폴라 압둘은 참가자에게 보통 좋은 말만 하는데 비해 사이먼 코웰은 필요없을 정도의 나쁜 말을 하는 데 열심이라, 참가자들한테 “저 재수없는 영국놈” “개XX” “내 궁둥이에 뽀뽀나 할 놈” 같은 다양한 욕을 듣기도 한다. “당신이 본선에 진출하는 날은 폭스TV 방송사가 문닫는 날이다” “정말이지 당신 같은 최악의 목소리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중 최악의 목소리다” 같은 주옥같은(!) 말들로 참가자들의 가슴을 짓밟는 데 선수. 지난해 방송된 6시즌의 우승자 테일러 힉스는 나이에 비해 나이들어 보이는 외모인 데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소유자인데, 사이먼 코웰은 힉스의 할리우드 오디션 때 “누가 보면 참가자 아버지가 온 줄 알았을 것”이라는 폭탄발언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목소리나 음정 등에 관한 정확한 코멘트를 하기 때문에, 본선 진출자들은 그의 충고에 꽤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지난한 지역 오디션 때 빛을 발하는 사이먼 코웰의 말말말 잔치, 놓친 분이라면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