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소리 전문가인 상우(유지태)와 프로듀서 겸 아나운서인 은수(이영애)는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함께 만든다. 소리를 찾아다니며 녹음하고 방송하는 동안 신비로운 사랑이 싹트고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진다. 결혼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상우와 달리, 이혼한 경력이 있는 연상의 은수는 결혼을 피해 조금씩 상우로부터 멀어진다.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린 은수를 보며 아직 식지 않은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상우에게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손길과 아버지가 건네는 소주병이 조용한 위로가 된다■ Review
대숲 바람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정선의 아우라지 물소리, 바닷가 파돗소리, 정선 아라리, 보리밭 찰랑대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나지막한 콧노랫소리. 오늘 우리의 것이 아닌 듯한, 사라졌거나 숨죽이고 있을 법한 이 모든 작은 소리들이 한 젊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동행한다. 거기에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시작되는 옛 노래는 상우 가족의 정서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끌어가는 한축을 담당한다.
공간 또한 강원도 산간마을과 숲, 절, 그도 아니면 오래된 주택이나 적당히 작고 허름한 아파트 등 이런 소리들이 존재하고 어울릴 법한 곳이다. 색조는 또 어떤가. 낮고 어두운 편이지만, 우울하지 않고 따뜻한 범위 안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미묘하게 통제되어 있다.
데뷔작 가 고 유영길 촬영감독과 함께한 작품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봄날은 간다>가 보여주는 여일한 스타일을 두고 감독으로서의 허진호에 대해 안도했을 것이다. 또한 영화를 보고 나면 인간 허진호의 심상이 그려지는 듯하다. 모르긴 해도 평소의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있는 듯 없는 듯 옆에 조용히 앉아서 인간의 표면과 그 너머를 동시에 읽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봄날은 간다>의 정서는 극중 인물의 독특한 가족 구성에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우의 가족은 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아들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부자는 서로 말수가 적어서 무뚝뚝해 보이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어느 만큼은 대신할 정도로 속 깊게 일상을 공유해온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할머니와 고모로 이루어진 여자 쌍이 첨가되었지만 이들 역시 아버지가 없다. 그 결핍은 두 여성에게 미묘한 친밀감을 더해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죽음에 지배받거나 죽음을 관찰하는 위치에 놓이며,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은 소멸해가는 것들에 대해 애틋한 집착과 함께 두려움을 갖는다. 전편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자신의 죽음이었다면, 이번에는 멀어지는 사랑이다. 그는 늘 힘겹게 두려움을 이겨낸다.
<봄날은 간다>가 주는 감동의 원천은 이처럼 조용하고 다감하며 예민한 관찰력을 가진 남성 캐릭터에서 온다. 사실 우리 영화 가운데 20대 후반의 남자가 사랑을 시작하고 열병에 시달리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사랑을 식히고, 거기에 더하여 마지막 남은 미련으로 망설이는 미미한 신호를 보여준 적이 었었던가? 배우 유지태는 이런 연기에 적역으로 꼽힐 만한데, 다소 체중을 늘임으로써 실제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극중 캐릭터에 무난하게 맞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우 자신에게나 감독들이 보기에 중요한 필모그래피를 첨가하기는 이영애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감독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친화력이 강하다. 현실을 거칠게 공격하거나 싸늘하게 냉소하지 않고, 소멸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면서도 애틋함을 잃지 않는 정서는 한국 관객의 호감을 살 만한 요소다. 이런 측면이 서구의 이른바 작가주의 예술영화의 기준으로 볼 때는 다소 감상적이고 약간의 멜로적 과잉을 내포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 영화를 관람하는 일반 대중의 감성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상업영화계가 배출할 수 있는 가장 균형 잡힌 작가주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의 쇼치쿠, 홍콩의 어플로스 픽처스와 함께 한국의 싸이더스가 합작투자 형식으로 제작했으며 3개국에서 공동 배급하기로 사전 협의된 작품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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