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화적 불평등 - 미국적 vs 무국적적
TV판이든, 극장용이든 미국산 애니메이션들은 미국산이라는 출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의 상징 ‘슈퍼맨’의 어린 시절을 다룬 <스몰빌>, 말괄량이 여자아이들을 다룬 <파워퍼프 걸>, 엽기적인 욕쟁이 초등학생들이 나오는 <사우스 파크>, 전형적인 미국 가정을 보여주는 <심슨> 등은 미국식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미국 사회를 스스로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비판 의식조차 오히려 미국인의 자신감과 여유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미국 백인사회의 오버로 읽히기도 한다.
서양과 백인우월주의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대표해온 디즈니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코드였다.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에 나오는 백인, 금발 여자들은 백마 탄 왕자와의 로맨스라는 시대착오적인 남녀관계를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뮬란> <포카혼타스> <릴로 & 스티치>의 동양 여성들은 좀 떨어진(?) 외모를 지녔으며, 악역들은 대체로 검은 머리와 라틴, 아랍 쪽 외모를 지니고 있다. 특히 <뮬란>에서 주인공이 남장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받는 모습은 동양과 여성에 대한 미국의 편협한 사고를 드러낸다. 특기할 만한 것은 동양의 여전사를 다루는 <뮬란>과 <모노노케 히메>가 각각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 동양과 동양인의 관점에서 본 서양을 동경하듯 그린다는 점이다.
일본, 특히 지브리산 아니메들은 자국의 문화에 별로 기대지 않는다. 일본이 동양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면서도 동양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중 하나다. <붉은 돼지>의 20세기 이탈리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19세기 유럽, 그리고 일본인 듯 아시아인 듯 유럽인 듯, 아니 어디라도 좋은 <모노노케 히메>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 그 이야기들이 왜 무국적적이거나 탈국적적이어야 하는 걸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개인적 취향도 있겠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을 점령한 서양사대주의와 동서양의 퓨전 양식이 일본식 신화와 만났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듯하다.
4. 기술의 차이 - 부드러움 vs 강함
미국이든 일본이든 회사별로 다양한 그림체가 공존한다. 게다가 퍼펫, 클레이, 셀, 디지털, 3D 퍼포먼스 캡처 시스템 등 다양한 특수효과 기법으로 진화하고 있어 양국 기술의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미국산 애니메이션의 인물은 행동과 선이 부드럽고 섬세하며 배경이 웅장한 느낌인데 반해, 일본의 인물은 상대적으로 역동적이고 선이 강하면서도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이는 프레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미국은 1초에 24장을 그리는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을 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사실적이기보다는 애니메이션다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크레더블>이 대표적이다. 말을 할 때 입 주위와 얼굴 전체 근육이 따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일본은 전체 얼굴을 매번 그리면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입술 부분만 따로 그린 뒤 겹쳐서 사용한다. 입술이 열려 있는 그림, 반쯤 열린 그림, 닫혀 있는 그림을 얼굴 전체가 그려진 그림 위에 겹쳐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1초에 8장이나 12장을 그리는 이 기법을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른다. 또 한번 사용한 그림을 재사용해 반복 컷을 내보내는 뱅크 시스템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처럼 1분 가까이 정지하는 스틸 컷을 이용해 그림의 장 수를 디즈니의 10분의 1로 줄인다. 대신 과장된 원근법, 풍부한 색감과 역동적인 동작을 사용하고, 여기에 효과음이나 카메라 워킹, 성우의 연기력, 탄탄한 이야기 등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스피디하면서도 멋진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축소 지향의 일본인’답게 정교하게 축소해놓은 완구, SF물을 연상하게 하는 도시나 물건, 기계 따위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도 <공각기동대>류의 미래사회, 메카닉 계열의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애니메이션이 발달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 애니메이션, 살아나나?
한국 애니메이션은 어디쯤 와 있을까? 일본 업체의 하청 위주의 산업 구조, <아기공룡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 등 입체감없는 그림체, 따스하고 일상적이지만 창의력 부족한 스토리 라인,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 이런 것이 지금껏 한국 애니메이션이 지닌 한계였다. 현재 일본과 미국이 장악한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비중은 0.4%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 IT 산업 발전과 함께 하청 위주에서 기획과 창작 위주로 체질 개선에 나선 한국 애니메이션이 서서히 날개를 펴고 있다.
TV시리즈 <뽀롱뽀롱 뽀로로> <오드 패밀리>는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었고, <아이언키드>는 미국과 유럽에, <믹스 마스터>는 동남아에, <장금이의 꿈>은 일본에 각각 수출되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장금이의 꿈>은 일본 외에도 대만·홍콩·태국·필리핀 등 17개국에 이미 수출됐으며, 중국·말레이시아 등과 판매 협상을 벌이고 있으며,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아시아 지역 최고의 판매기록을 세울 것이란 전망이다. 또 6∼8살 아동을 타깃으로 한 52부작 TV 애니메이션 <로켓보이 & 토로>는 우주정복의 야심을 가진 슈퍼컴퓨터 ‘닥터 스퀘어’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우편배달소년 ‘로켓보이’의 속도에 관한 비밀을 캐내기 위해 멍청한 우주해적단을 보내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해프닝을 다루는 코믹 어드벤처로, 국산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2008년부터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에서 방영된다.
여기에 <로보트 태권V>는 3D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며, 인기 애니메이션이 어린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난다. 개그 듀오 컬투가 제작에 나선 8억원 짜리 3D 애니메이션 <아이언키드>, 30여 개국에 수출된 <뽀롱뽀롱 뽀로로>, 2001년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을 제치고 미국 애니메이션 TV 시청률 1위를 기록해 화제가 되었던 <큐빅스 대모험>, 20, 30대 마니아층을 갖고 있는 <개구리 중사 케로로>, <믹스 마스터> 등이 줄줄이 선보일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제작비 35억원, 제작기간 8년이 걸린 순수 토종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은 폭력, 욕설 등으로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지만 세기말 키치적 감수성과 사회 비판, 2D와 3D를 성공적으로 결합하며 한국 애니메이션 작품과 스타일의 변화를 예고했다. 또 <마리 이야기>로 유명한 이성강 감독의 신작 <천년여우 여우비>는 꼬리가 다섯개 달린 10살짜리 구미호 소녀의 사랑을 다룬 로맨스 판타지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