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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2001-02-16

<번지점프를 하다>는 어느 날 어떤 장소에 못 박혀 영영 멈춰 있는 감정을 불러내는 영화다. 입영열차를 타던 날, 약속했던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남자의 심장은 더이상 뛰지 않는다. 살아 있어도 그를 두근거리게 할 일은 이제 없다. 그녀 손을 잡으면 흥분해서 딸꾹질이 나오던 수줍고 풋풋한 사랑과 작별한 것이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된 그 앞에 나타난 17살난 앳된 소년, 그 아이를 보면서 남자는 가슴이 터질 듯 아파오는 걸 느낀다. 그는 소년에게 옛 연인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운명이 갈라놓은 연인’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다루지만 <번지점프를 하다>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낯설고 신선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환생하고 미처 몰랐던 과거가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노스탤지어와 판타지를 오가며 미스터리를 함축한 이야기라면 <은행나무침대>나 <동감>도 있지만 <번지점프를 하다>는 영리하게도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간다. 영화는 불현듯 찾아와 달뜬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과거와 격정에 휩쓸려 모든 걸 망치는 현재를 나란히 놓고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감정에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그녀는 하필 어린 남학생으로 되살아나 존경받던 선생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가? 잔인하고 몹쓸 신의 장난 앞에 연인들은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극의 전반부에서 성공한 멜로드라마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빠짐없이 보여준다. 여름 소나기 속 남녀가 만나는 첫 장면에서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매력적인 여인이다. 이은주는 여기서 <오! 수정>에서 발가벗겨졌던 어떤 과정을 되풀이한다. ‘어쩌면 우연’인 그날 첫 만남이 ‘어쩌면 의도’임이 밝혀졌을 때 <오! 수정>과 달리 관객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에 운명의 광채를 더할 뿐이다. <번지점프를 하다>가 데뷔작인 김대승 감독은 ‘영혼이 통하는 사랑’을 믿으며 거기에 낭만적 색을 더한다. 전반부에서 그의 구상은 무리없이 실현된다.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날>을 연상시키는 해맑은 첫사랑이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아련한 노스탤지어로 되살아난다. <기쁜 우리 젊은날>에서 안성기가 그랬듯 이병헌의 순진무구한 표정과 수줍은 행동은 극의 전반부를 시종 미소를 머금고 지켜보게 만든다. 영화는 비에 젖은 연인이 후미진 골목 여관방을 찾았을 때 일을 정감있게 그리며, 노을진 해변에서 왈츠를 추는 대목에서는 잠시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의 시작에서 절정까지 차곡차곡 쌓인 감정은 17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었을 때 삐걱거린다. 소년에 대한 이병헌의 집착은 채 감정이입할 준비도 없이 찾아온다.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전에 격정에 휩싸인 탓에 반전을 향한 줄달음은 꽤 숨가쁘다. 데뷔감독에게 호흡을 고를 수 있는 여유까지 기대하는 건 지나친 것일까? 또 하나 문제는 동성애에 대한 태도다. 영화는 그들의 사랑이 이성애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남자 대 남자(혹은 여자 대 여자)로 사랑하느니 다시 태어나겠다는 식의 주장은 무지가 낳은 용기 같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최근 나온 멜로물들이 대체로 그렇듯 신선한 발상, 꼼꼼한 세부묘사, 깔끔한 기술수준 같은 걸 보여주는 데 멈춰 있다. 17년 전 용산역 플랫폼에서 멈춘 남자의 심장은 환생한 소년을 통해 다시 뛰건만 한국의 멜로드라마는 를 제외하면 아직 배창호, 이명세를 넘지 못한 채 좀처럼 가슴벅찬 순간을 맞지 못하고 있다.

남동철 기자[email protected]

김대승 감독 인터뷰

"천차만별 반응을 기다린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김대승 감독은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 연출부로 시작해 임권택 감독 밑에서 오랫동안 조감독을 했다.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 <노는 계집 창> <춘향뎐> 등 연출부 경력만 10여년. 최근 데뷔감독 가운데 드물게 도제시스템에서 오랜 연출수업을 한 경우.

"시나리오의 어떤 면에 끌려 연출하기로 했나.

-데뷔작으로 작은 얘기를 탄탄하게 하고 싶었다. 혼자 시나리오를 쓰다가 어느 날 <번지점프를 하다> 각본을 봤는데 멜로면서도 호락호락하거나 말랑말랑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멜로면서 박진감도 있고 미스터리도 있고 내 생각도 담을 수 있겠다 싶었다. 시나리오 보면서 이거 여자가 썼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천명이 보면 천명이 다 다르게 보는 영화였으면 싶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멜로영화를 만드는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사랑이라는 게 굉장히 사적인 문제 아닌가. 받아들이는 것도 사적이었으면 싶다. 또 하나는 자꾸 메시지가 뭐냐는 질문을 듣는데 사랑얘기는 결국 자기 경험에 비춰 뭔가 끄집어내는 게 아닐까 싶다. 하나의 메시지가 있는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 반응이 천차만별인 영화였으면 한다.

동성애 묘사에 대해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거 같다. 동성애자가 보기에 기분나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난 동성애를 혐오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현빈이는 “호모”나 “동성연애”라는 말을 쓰지 않고 “동성애”라고 말하지 않나. 신경쓰였던 건 사실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악감정은 전혀 없다. 고난을 겪는 하나의 과정으로 그린 것일 뿐이다.

인우가 현빈에게 집착하는 과정이 느닷없어 보인다.

-현빈이 태희이기 때문이다. 인우가 별다른 이유없이 현빈에게 끌렸다가 나중에 태희라는 걸 깨닫는다는 설정이었다. ‘아, 그래서 저랬구나’하고 받아들이길 바랐는데 느닷없어 보였다면 연출에 문제가 있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의 전제는 몇번을 죽었다 되살아나도 이어지는 사랑이 있다는 것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려운 얘기인 거 같은데 뭔가를 절실히 원하면 언젠가 이뤄질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자기 옆에 있는 애인을 보며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지 한번 의심해보고 서먹한 관계의 남녀여도 이 사람의 영혼과 내 영혼이 교감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길 바란다. 연세가 드신 분이라면 내 첫사랑은 어땠는지 돌아봤으면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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