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오락의 결정판.” 2004년 2월, <괴물>을 준비하던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설명한 말이다. 그로부터 2년 남짓, <괴물>은 봉준호 감독의 예고에 걸맞은 영화로 태어났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담을 답습하는 대신 한국적 상황과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는 봉준호 감독은 그의 이전 영화들이 갖고 있던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도 괴물영화의 장르적 장점을 ‘지금, 여기’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크기로 압도하는 괴물도, 과학자나 슈퍼히어로도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공감을 얻는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한가로운 오후의 한강 둔치에 괴물이 등장한다. 아버지 희봉(변희봉)과 한강 둔치 매점을 운영하는 강두(송강호)는 딸 현서(고아성)가 눈앞에서 괴물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활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양궁선수인 남주(배두나)와 말 많은 대졸백수 남일(박해일)은 조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한다. 현서의 죽음에 슬퍼하던 강두는 현서에게서 온 전화를 받게 되고, 강두 일가는 현서를 구하기 위해 한강 하수구를 뒤지기 시작한다.
<괴물>에 ‘한국적’이라는 수사가 합당한 이유는 사건의 배경이 서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초반, 그리고 영화 내내 카메라가 응시하는 음울하게 빛나는 한강과 위압적으로 솟아 있는 한강 다리들이 빚어내는 익숙한 공간의 낯선 표정은 배경이 아니라 괴물을 낳은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보통 사람 이상의 지적 수준이나 육체적 능력을 가진 영웅이 등장하는 대신 괴물에게 납치된 어린 현서를 구하려는 평범한 일가족이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족의 면면을 살펴보면 흔히 말하는 평범을 밑돈다. 강두는 사고쳐서 낳은 딸을 애지중지 키우고는 있지만 매점 운영에 무성의해 잠이나 자고, 남일은 조카 학교에 가면서도 술냄새를 풍기는 인물이다. 이러한 가족 설정은 봉준호식 유머가 개입할 여지를 <괴물>에 열어주었다.
괴물도 마찬가지다. 괴물은 폭압적으로 도심을 누비며 힘을 행사하지도 않고 건물을 손쉽게 부숴버릴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지 않는다. 한강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생명체인 괴물은, 연꽃처럼 벌어지는 기형 입과 애처롭게 보일 정도의 작은 기형 다리를 달고 있다. 괴물 CG는 대낮의 한강 둔치에서 완벽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아쉬운 대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괴물이 애크러배틱한 동작으로 한강 다리 하단을 꼬리로 감아가며 이동하는 장면이나 괴물의 아지트에서 행동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괴물에 들어간 예산은 40억원에 달해 제작비 110억원의 36%에 달하지만, 괴물을 독특한 모양새를 가진 또 하나의 인격체로 만든 것은 괴물 디자인을 위해 그려진 스케치 2천여장과 2년6개월에 있다. 현재 <괴물>이 싸워야 할 유일한 근심이 있다면 CG의 완성도나 장르적 쾌락에 충실함, 혹은 드라마의 완결성이 아니라 칸에서의 호평과 언론의 열광 덕에 한껏 높아진 관객의 기대치 온도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괴물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대신 변주를 꾀하고, 또한 성공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목은 한강 둔치에 괴물이 출몰하는 초반 대목이다. 괴물의 등장까지 뜸을 들이는 대신 괴물은 갑작스레 등장해 안온한 일상적 공간을 공포의 무대로 일순 바꿔놓는다. 하지만 이후 가족이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는 드라마가 강조되면서 긴장감은 초반의 팽팽함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한다. 가족이 각기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기까지, 한 인물의 극적 상황과 비명소리에서 다음 인물의 고요한 탐색 장면으로 넘어가는 대목들이 잇따라 같은 방식으로 편집되어 이어지는 것은 몇번의 충격효과 이후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문젯점도 보인다. 하지만 장르를 한국적 상황으로 치환시킨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르면, 화염병과 양궁과 같은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괴물의 탄생 원인이며 뒤에 강두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미국/미군의 존재는 정치적인 함의를 풍기지만 이런 면은 정치적 프로파간다라기보다는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준 바 있는 현실비판과 풍자라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가족의 탈출과 이후 도피과정에서 보이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도 봉준호 감독의 블랙코미디적 감수성을 <괴물>이 살려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납치된 가족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는 가족을 연기한 배우들의 호연은 <괴물>을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다. 과장해 부풀리는 대신 슬픔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 배우들의 연기는 그 어떤 포효나 광분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변희봉의 모습에서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를 연상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활을 든 배두나의 눈빛에서 날카로운 비장미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웅의 탄생보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달리는 가족들에게서 고립된 현서가 자신보다 어린 소년 세주를 괴물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설정은 <괴물>의 정서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괴물>은 숙명적 비극의 기운을 끌어안고서도 휘청대지 않고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희망을 향해 달려간다. 관습적 해피엔딩을 고수하는 대신 <괴물>은 강두가 강두이기 때문에 소중히 할 만한 풍경을 선사한다. 패배감을 체득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리석을 정도의 강직함으로, 보이는 건 모두 돌아앉은 것 같았던 세상에 맞서 얻어낸 것은 그래서, 승리와 성취감이 아닌 삶과 현실에 방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