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홍성담의 5월 판화 연작 180여점이 광주시립박물관으로 간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가 80년대에 제작했던 ‘오월’ 판화 연작 180여점이 ‘하정웅 컬렉션’으로 한몫에 팔려나가 새 생명을 얻으려 광주시립박물관으로 떠나던 날… ‘하정웅 컬렉션’이 인권과 평화라는 올곧은 주제를 지닌 미술품들만 모으고 있다는 걸 알기에… 돌아보니까 내가 판화 한점 멋있게 파야겠다 해서 만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그때그때 화급한 쓰임새가 있어 달려든 것들이었어요. 포스터를 급히 찍어야 한다, 팸플릿 표지가 필요하다, 분신한 열사도가 있어야겠다….”(<한겨레> 8. 23.)
생각해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딘가로 맹렬하게 달려가던 한때가. 그러다가 조금씩 힘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풍경들도 어느덧 회색으로 바래져갔다. 이곳저곳에서 ‘5월’이라는, ‘광주’라는 단어가 들려도 큰 울림이 없었다. 아니, 그저 개인적인 쇠락일 뿐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그렇게 지나갔다. 언제나 세월은 어디론가 흘러가니까. 그러다가, 그 시절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졌던 ‘5월’ 판화 연작이 미술관으로 들어가 영원한 과거, 예술로 남는다는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그 일들은 ‘과거’가 된 것일까. 어쩐지 미련이 남는다.
나에게 5월이란, 사회적 의미보다 사적인 흔적이 강하다. 박정희가 죽고 광주항쟁이 일어난 것이 중학교 시절, 광주의 참상을 안 것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광주의 사진을 본 이후 나에게 5월이란, ‘진실’이란 의미였다. 그때 나는 염세주의에 빠져 있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을 본 뒤 나는, 세상에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에 가야겠다는 것도, 그때야 생각했다. 그 깨달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고, 여전히 무엇인가를 찾아헤매야 한다는 것.
아직 한주가 남았고 김지운 감독이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지만, 나로서는 이게 마지막 숏컷이다. 지면개편이 되면서 숏컷은 사라질 예정이다. 사실 1년 전쯤에 이미 숏컷을 그만 쓴다고 선언했다가 슬그머니 돌아온 주제라, 다시 할말은 별로 없다. 게다가 완전히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다시 ‘이창’으로 끼어든다. 결정권도 없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일이긴 하지만, 어쩐지 거짓말쟁이가 된 느낌이 든다. 그만 쓴다고 했다가 돌아오고, 또 그만두면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고. ‘화차’(火車)처럼 굴러가는 인생이라 그런가….
‘숏컷’은 제목처럼, 순간순간 느끼는 단상들을 끼적거린 것이었다. 그것들에 대해 뭔가 커다란 그림을 그릴 의사도,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리고 미래의 영원한 날들에도 나는 여전히 세상을 알지 못한 채 돌아오지 않을 물음을 던지고 작은 해답을 찾으려 할 것이다. 순간의 기억들이 과거가 되고, 영원히 지속된다. 물음들이 매순간 재귀(再歸)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해답을 알지 못하고, 끝없이 생각할 것이다. 로버트 알트먼이 영화 <숏컷>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우리의 인생과 세계는 찰나의 순간들이 중첩되면서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이란 게 정말 존재하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