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이 자리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겠다는” 이라는 미래형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씨네21>이 나온 건, 고이즈미가 이미 참배를 끝낸 뒤였다.(시제를 바로 잡습니다.)
2차 대전의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참배를 유럽의 언론은 자기들 식으로 보자면 히틀러 추모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단순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런 논평을 읽고나니 지난해 유럽을 들쑤셔놓은 외르크 하이더 사건이 떠올랐다. 제50회 베를린 영화제를 취재하러 갔을 때, 나치에 우호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한 오스트리아 자유당 당수를 규탄하는 소리가 외신으로 보고 듣던 것보다 훨씬 격앙돼 있는 데 조금 놀랐다. 공항 대기실의 신문들은 언어에 상관없이 일제히 하이더 비판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한 발 늦게 도착해서 개막날 풍경은 볼 수 없었는데,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그날의 포츠담 광장을 지킨 <씨네21>의 박은영 기자로부터 다시 하이더 관련소식을 들었다. 그때의 베를린 리포트에도 들어 있는 이야기다. “초청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외 멀티비전이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동안, 그 옆엔 소규모 데모단이 떴다. 영화제 참석차 날아온 오스트리아 영화인들이, 최근 연합한 정치권 우익세력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인종주의자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유럽 전역의 불행이라는 생각에, 군중이 운집한 기회를 틈타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때마침 할리우드에서는 아카데미 후보작 지명을 앞두고, 오스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영화를 후보선정에서 제외하자는 의견도 돌출하고 있었다. 포츠담의 영화인들을 의식했다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하이더는 물러났다. 오스트리아와 유럽의 경우를 고이즈미와 아시아에 단순대입할 수는 없다. 고이즈미는 하이더보다 지지율이 높고, 일본은 유럽 속 오스트리아보다 아시아에서 힘이 크다. 그러나 갈길이 멀다고 발 떼는 수고를 아낄 필요 있을까.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율을 0.4%로 묶어 놓은 일본의 시민의 힘이 야스쿠니에서 일어난 역사의 퇴행을 바로 잡기를 바란다. 영화와 영화인들이 거기 함께하기를 또 바란다. 포츠담 광장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