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Short Cut
어쩌면… 인간이 꾸는 꿈

김봉석 칼럼

<A.I.> 를 보면서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날 <바이센테니얼맨>을 DVD로 보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왜 그들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 <바이센테니얼맨>의 앤드류는 인간보다 힘이 세고, 일종의 오작동으로 창조적인 재능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영원불멸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인간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납득이 가지만, 모든 면에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A.I.> 의 데이빗은 한번 입력된 뒤 폐기될 때까지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어머니가 데이빗을 사랑하면서도 버린 이유가 자신이 ‘진짜’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래서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다. SF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는 흔히 ‘나약한’, 혹은 ‘모순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듀나의 말대로, 서구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결코 영원불멸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껍데기일 뿐이고, 영혼이 없는 육신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답변은 끝나지 않는다. 애니미즘의 전통이 강한 동양에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요괴나 동물의 이야기는 수없이 널려 있다. 서극의 <청사>나,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설녀나 여우의 이야기도 그렇고, 단군신화에서도 호랑이와 곰은 인간을 원한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타자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관된 주제였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영화나 만화 등에서도 그런 주제는 반복된다.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닌 외계인은 혼돈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면에 탐닉한다. 인간의 ‘정서적’인 면은 무엇보다도 우월한 가치로 흔히 부각되곤 한다. 모든 것이 정돈되고, 오직 하나의 가치만을 찾아가던 우월한 존재가 나약한 인간의 ‘카오스’에 매혹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카오스는 말 그대로 혼돈이고, 모든 것의 시원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인간에 대한 갈망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전제는 동의할 수도 있다.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없는 무엇인가를, 타자를 갈망하게 마련이다. 집단주의는 자유주의를, 자유주의는 집단주의를 서로 갈망한다. 갈망하고 그 요소를 수혈하지 않는 한 어떤 체제든, 존재든 자멸하게 된다. 하지만 로봇이 인간을, 외계인이 인간을 갈망하는 사고의 근원에는 인간이 우월하다는 자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로봇이 인간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권력을 부러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빙하기가 닥치고 모든 인간이 사라진 뒤 깨어난 데이빗이 만난 로봇들은 아마, 인간이 되고 싶다는 꿈 같은 것은 결코 꾸지 않을 것 같다. 단지 권력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혹 질투나 부러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욕망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A.I.> 의 결말처럼 행복한 ‘전화’(轉化)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고령가소년살인사건>의 빈민가 소녀가 외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싸늘한 절규에 가슴이 아리다. 무엇인가를 원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지독한 현실. 그래서 인간은, <A.I.> 의 꿈을 꾸는 것일까.

[email protected]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