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 권상우가 바가지머리의 철없는 청춘이라니. 암흑가 거물에 맞서는 다혈질 형사로 종횡무진 스크린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 이제 겨우 한달이다. 몸짓 하나하나마다 배어 있는 거친 날짐승의 체취가 아직도 생생한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나 천진하게 미소를 날리는 모습이라니 갑작스럽고 낯설다. 아차, 깜빡 잊고 있었나보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옷을 갈아입고, 그때마다 이것이 내게 꼭 맞아, 하고 시치미 뚝 떼는 것이 배우라는 자들의 주특기라는 오래된 진리를. 무채색의 세계에서 원색의 세계로 귀환한 권상우는 마치 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 자신을 둘러싼 공기 전체에 경쾌함을 퐁퐁 쏟아놓았다.

10년지기 소꿉친구이자 앙숙인 지환(권상우)과 달래(김하늘)가 서로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 <청춘만화>. 순정만화에서 훔쳐온 듯한 설정인데, 지환이라는 캐릭터는 권상우 자신의 모습과 겹치는 점이 많다. “많이 닮았죠. 지환이처럼 제가 진짜로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게 성룡 같은 액션배우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덤블링도 만날 하고 태권도 도장도 다니고.” 뒤끝없고 솔직하다는 점에서도 둘은 꼭 닮았다. “지환이라는 인물은 긍적적이고 다혈질이에요. 꿍하는게 없기 때문에 얄밉게 굴어도 용서가 된다고 할까. 저도 그래요. 금방 화내고 금방 풀리고. 고민거리가 있다고 잠 못 자고 그러지 않아요. 에이-씨, 하고 자요. 뒤에서 욕하고 그러지 않고 앞에서 욕하고 앞에서 풀고.”

솔직함은 순수함과도 통한다. 물론 해사한 얼굴에 순도 100%의 미소를 띄우는 화장품 CF 속 권상우의 이미지는 환상이겠지만, 적어도 그는 순수함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다. 이제는 입버릇이 되어버린 “35살쯤 되면 배우를 그만둘 것”이라는 폭탄선언(?)도 알고보면 순수함을 잃어가는 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굉장히 철없이 노는데, 걔네를 보면서 너희는 아직도 순수하구나, 한 발짝 떨어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내가 정말 싫어요.” 자신을 상품으로 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계산적이 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세계가 그에게 ‘정답’이 아님은 분명하다. “순수함을 잃어가는 동시에 순수함을 연기해야 하는 것이 참 힘들죠. 하지만 이제 이런 역은 못할 것 같았어요” 나이가 들고, 점차 변해가는 자신에게 잠깐이라도 제동을 걸고 싶다는 소망. <청춘만화>를 선택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미리 은퇴(?)를 선언해버린 권상우이지만 배우로서 가진 욕심은 결코 작지 않다. 스스로 “한방에 목말라 있다”고 말하는 그가 생애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말죽거리 잔혹사>의 기사 시사회. “시사회가 끝나고 불이 딱 켜졌는데 사람들이 절 보는 눈빛이 다른 거예요. 아니 쟤가? 하는 놀란 표정”. 가진 건 스타성뿐이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에게 시원하게 한방을 날린 순간이다. 아직 ‘연기생활’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경험도 연륜도 부족하지만, 권상우의 시선은 수십년 뒤를 향한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주말의 명화>나 <토요명화>로 내가 출연한 작품이 나오고, 어린 친구들이 ‘야, 우리 땐 이 영화가 최고였어’ 하고 말하는 것”. 그것이 그가 꿈꾸는 인생의 ‘한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