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이튿날엔가 <친구>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나는 꽤 흐뭇했다. 영화를 보는 데 들인 돈도 시간도 아깝지 않았다. 나는 한편의 시큼들큼한 영화를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나는 이 영화가 잘 빚어진 작품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관객 수의 기록을 경신하리라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이 영화는 관객 수의 기록을 경신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잘된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대종상에서 푸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안 된 일이지만,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친구>가 대종상에서 따돌림당한 일로 영화계에 소란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나는 조금 어리벙벙했다. 물론 상을 받은 작품들을 내가 보지 못해서 비교를 해볼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영화계 내부의 어수선한 정치학에 대해서 아는 바도 거의 없지만, <친구>가 반드시 상을 받아야 할 영화라는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를 옹호하고 대종상 운영을 비판한 이들은 대체로 양식있는 영화인들로 알려진 분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틀렸을 것이다. 나는 상업적 판단에서만이 아니라 미적 판단에서도 무능했던 것이다.
술과 친구는 묵을수록 좋다는 주류 광고 카피도 있지만, 내게는 푹 묵은 친구가 없다. 아, 어려서부터의 친구들이 몇 있기는 하지만, 어울리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어쩌다 만나게 되더라도 공유하고 있는 관심사가 거의 없으니 자리가 밍밍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즈음 어울리는 친구들은 대체로 사회에 나온 뒤 사귄 친구들이고, 그것도 서른 이후에 사귄 친구들이다. 마음이라는 자원에 한계가 있다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옛 친구들과의 관계를 뜨게 만들 것이다. 그 자원이 무한하다면, 옛 친구들이 새 친구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쪽이 옳다고 내게 가르쳐준 이는 복거일씨고, 뒤쪽이 옳다고 내게 가르쳐준 이는 홍세화씨다. 내 생각에는 앞쪽이 옳은 듯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경우엔 앞쪽이 들어맞는 것 같다.
내가 요즘 어울리는 친구 가운데 E라는 이가 있다. 나중에 따져보니 초등학교를 잠깐 같이 다닌 동창이었지만, 그를 동창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10여년 전 어느 신문사의 문학기자로서 시인인 그를 만났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고, 지금까지 서로 마음 상하게 하는 일 없이 어울려오고 있다. 그즈음에 나는 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J라는 친구를 사귀었다. 한참 뒤, 나는 E를 통해서 H라는 화가를 알게 됐고, 그보다 얼마 뒤에 시 쓰는 김정환 형을 통해서 K라는 변호사를 알게 됐다. 스쳐지나가고 말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우연의 살가운 손길은 그들을 내 가까운 친구로 만들었고, 또 그들끼리도 서로 가까운 친구가 됐다.
요즘 한달에 한두번 그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장소는 대개 H의 화실이다. 우리는 모여서 일상의 짜증을 털어놓고, 삶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변협과 의협을 욕하고, <조선일보>의 엽기성을 조롱한다. 정다운 자리이기는 하지만, 부르주아들의 살롱과는 거리가 멀다. H의 화실은 편안하되 소박하다. 그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도 그렇다. 변호사 K야 살림이 비교적 넉넉하겠지만, 다른 친구들은 수지를 근근이 맞추는 정도고, 특히 시 쓰는 E는 은행잔고가 양수(陽數)로 기록되는 일이 별로 없다. E의 아름다운 점은 그럼에도 행동거지나 사고방식에 궁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영혼의 귀족이다.
얼굴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고 또 자주 만나지도 않는데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지는 이들이 있다. 내게는 진중권씨가 그렇다. 더 나아가 변영주씨나 유시민씨나 강준만씨처럼 육체적 대면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도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게 비친 그들의 생각과 삶이 정겹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생각과 삶의 닮음이 우정의 절대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H의 화실에 모이는 다섯 사람도 삶의 방식이나 생각의 각도가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 다름 밑에 깔린 어떤 보편적 가치의 공유가 건강한 우정의 필수적 밑받침인 것도 사실이다. 세계관과 독립된 이해관계만으로 맺어진 우정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주먹세계에서 선양되는 ‘의리’라는 것은 모든 우정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나이 한두살 더 먹어가며 깨닫게 되는 것은 의리만이 아니라 겸손이나 배려나 존중이나 관용 같은 부르주아적 덕목도 우정의 내용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의리라는 덕목이 공적 가치와 어그러질 때, 그 끈을 놓으며 서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정말 내가 원치 않았던 계기로 소원해지거나 또는 사귈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어쩔 수 없이 말이나 글로 상처를 주고받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도 이제 우정을 새로 만들기보다는 있는 우정을 가꾸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