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김수용 감독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왕성하게 현장을 지켜온 분이다. 늘 일기를 쓰는 덕분인지 기억력이 비상하고, 항상 카메라로 사고한 덕분인지 이야기엔 현장을 찍어서 전달하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김기덕 감독의 <빈집>에서 받은 감동을, 배우 재희의 연기를 흉내내 전달할 정도로 소년적인 감수성도 책 속에서 반짝인다. 윤정희와 갓 결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촬영현장까지 따라간 일화는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백건우가 남자 역의 이대근에게 정사신을 어떻게 찍을 거냐고 묻자 이대근은 “정사신이요? 마누라 없이 살던 놈처럼 허기지게, 체면없이 무자비하게 해치워야죠” 하고 답한다. 문학적 감수성과 모더니스트적 실험정신을 결합시키며 100편 넘는 연출을 한 노장의 증언은 충무로 역사의 빈 구석을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메꾼다. 그만큼 시각적이고 흥미로우며 구석구석 리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