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옆집에 사는 김성일씨는 스타일리스트이다. 그리고 그는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박희진이 연기했던 ‘안성댁’의 실제 모델이다. 나는 안성댁의 대사를 쓸 때가 가장 쉬웠다. 그냥 ‘과연 김성일씨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했을까?’를 고민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아직 그보다 더 재밌고 유쾌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를 들면 김성일씨의 차를 얻어 타고 삼성동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화려한 조명에 하늘까지 솟은 으리뻔쩍한 고층 아파트를 지나며 아직도 월세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부러움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아∼ 아이파크에 살고 싶다∼ 그치 형?” 그러자 김성일씨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갤러리아 백화점.” 황당한 표정의 나를 바라보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명품관…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은 집에 못 들어가겠구나….” 아∼ 그의 정신세계는 이런 것이다. 얼마 전 영화 <가문의 위기> 포스터 의상을 맡은 그가 촬영을 끝내고는 우리집 현관문을 뜯어낼 듯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얘! 얘! 얼른 일루 좀 앉아봐∼!!”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난 그가 뺑소니라도 치고 도망왔나 할 정도였다. “김수미 선생님… 역시 대가는 대가더라! 우아하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한쪽 구석에 말없이 앉아 그 고운 손가락에 가느다란 담배 한 개피를 끼운 채 허공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공작부인 같기도 하고 푸른 난초 같기도 하고 방울꽃처럼 수줍은 소녀 같기도 하고….” 거품을 문 칭찬은 내쪽에서 자르기 전까지 절대 끝나지 않을 기세다. “왜? 형이 준비해간 의상이 맘에 드신대?” “… 응… 너무 좋아하시더라…. 하지만 그것 때문에 김수미 선생님이 대단하시다는 건 아니야!” 이미 그의 표정엔 딱 걸렸네의 민망함이 가득하다.
그에겐 기술이라는 게 없다. 스스로는 세련된 매너로 사교계의 보석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고 싫은 내색을 감출 줄 모른다. 그는 아이 같고 그의 눈동자는 그의 속마음을 바로바로 문자로 알려주는 전광판 같다.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는 횟수는 나이와 비례하는 것 같다. 정말 웃는 게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친절하게 다듬어진 칼로 내가 못 보는 등을 긁을 것 같은 사람들이 도처에 깔린 듯, 나는 점점 히스테릭한 의부증 환자가 되어 상대방의 입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은 욕구를 주체할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김성일씨가 좋고 고맙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그이 행동과 말들은 끊임없이 내게 가르침을 준다. “결국엔 진심이더라….”
혹시 운이 좋아 기회가 닿으면 김성일씨를 꼭 만나보라. 마치 좁고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을 걷다 살짝 열린 어느 집 대문 사이로 주인의 손길이 늘 닿아 있는 소박하고 단아한 정원을 볼 때처럼 좋은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