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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순정파 어린 신부? <댄서의 순정>
신윤동욱(한겨레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2005-05-18

‘문근영 영화’의 법칙에 충실한 기획신파 <댄서의 순정>

문근영 영화’에는 법칙이 있다. 알다시피 제1의 법칙, 일단 순백의 면사포를 씌운다. 이미 알 만큼 알므로 자세한 설명 생략. 제2의 법칙, 영화 초반에 오빠(혹은 아즈바이)가 일단 한번 ‘우리 근영이’를 업어준다. <어린 신부>에서는 김래원 오빠가 할인마트에서 돌아오다 문근영을 업어주었고, <댄서의 순정>에서는 박건형 오빠가 단란주점에서 구출한 문근영을 업어주었다. 이유도 똑같다. 다리를 삐끗. 배경도 비슷하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골목길. 이 장면은 두 영화의 흐름에서 같은 구실을 한다. 억지로 엮인 커플의 교감이 시작되는 장면인 것이다. 왜 업어주기냐고? 아이 다루듯 업어주기는 대한민국이 문근영과 스킨십을 허하는 유일한 심의기준이다. 더 나가면 국민정서법의 검열에 걸린다. 제3의 법칙, 영화가 지루해질 때쯤 꼭 뮤직비디오 한편 찍는다. 역시 알다시피 <어린 신부>에서는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였고, <댄서의 순정>에서는 “야래향”이었다. <댄서의 순정>은 <어린 신부> 따라하기가 민망했는지, 깜찍 뮤비의 무대를 <어린 신부>의 노래방에서 춤연습실로 바꾸는 ‘모험’을 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진리를 반박하는 예술정신의 승리다.

제4의 법칙, 어떡하든 유니폼을 입힌다. <어린 신부>에서 고딩인 보은이 교복을 입은 것은 이해되지만, <댄서의 순정>에서 다 큰 처녀가 여고(아니 초딩 같은) 체육복은 왜 입나? 당근, 무조건 유니폼을 입어야 문근영의 ‘평범한 소녀성’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얘는 이렇게 입어도 어쩜 저렇게 예쁘니.” 제작자는 문근영을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한다. 마지막 제5의 법칙, 문근영은 돌아온다. 그리고 성인식을 치른다. <성인식>의 가사처럼 <어린 신부>는 “오빠, 나 이제 어린애 아냐”라는 대사로 끝나고, <댄서의 순정>은 “다시는 이런 사랑 만날 수 없을 거예요”라는 독백으로 흐른다. 그리고 ‘더 파워 오브 러브’에 밀려 경쟁자인 <어린 신부>의 정우도, <댄서의 순정>의 현수도 말없이 사라져준다. 아름다운 해피엔딩, 모두가 감동한다. 법칙의 법칙, 오빠들은 주고, 문근영은 받는다. 문근영은 천배, 백배로 돌려준다.

<댄서의 순정>=<어린 신부2: 수입 신부>?

<댄서의 순정>은 순정하지 않다. 아무리 문근영에 기댄 기획영화지만, 심하게 <어린 신부>에 기대고 있다. 차라리 제목을 <어린 신부2: 수입 신부> 혹은 <어린 신부19: 옌볜 처녀>로 붙이는 게 솔직하지 않았을까? 옌볜 처녀가 입국을 위해 위장결혼을 하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팔려다니는 구도는 <파이란>을 닮았다. 요컨대 <댄서의 순정>은 <파이란>의 19살 버전으로 시작해서 <이수일과 심순애>의 옌볜 처녀 버전으로 끝난다. 근래 보기 드문 본격 신파다.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따라간다는 댄스스포츠의 통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영새는 가르치고, 채린은 배운다. 사랑이 익어갈 무렵 침입자가 나타난다. 댄스스포츠계의 김중배, 현수는 돈으로 채린을 가로챈다(영화에서 정말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 목걸이를 선물한다). 남자는 좌절하고, 여자는 팔려간다. 하지만 일편단심 민들레는 피어난다. 여성은 돌아오고, 사랑은 완성된다. <댄서의 순정>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진리를 순정하게 실천한다.

<댄서의 순정>은 <어린 신부>의 법칙에 따라 101편의 광고와 1편의 뮤직비디오로 구성된다. 문근영이 푸딩을 먹으면 쁘띠첼 광고 같고, 문근영이 커튼을 젖히면 아파트 광고가 된다. 이음새가 허술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 선생이 왜 변심을 하는지, 영새는 왜 포기를 하는지, 영화는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다고 치고 대중의 눈치를 본다. 보통 신파조의 구성이라면, 채린을 빼앗은 현수가 채린을 해하려 해야겠지만, 현수는 “프로페셔널” 운운하며 해하지 않는다. 문근영이니까 해하지 못한다. 언감생심 해했다가 돌팔매를 맞는다.

<댄서의 순정>의 채린은 <어린 신부>의 보은보다 더한 순정파다. 어찌나 순정한지, 오빠밖에 모른다. 그래도 보은은 살짝 ‘엽기적인 그녀’였다. 오빠를 괴롭히는 동네 깡패들을 패기도 하고, 해병대 선배들에게 개개는 엽기적인 면모가 있었다. 또래 야구선수에게 한눈도 파는 철없는 어린 신부였다. 하지만 16살 서울의 엽기적인 그녀는 19살 옌볜의 순정한 댄서로 커버렸다. 세월은 흘렀지만, 나이는 거꾸로 먹었다. 도통 자신이란 없고, 오빠만이 전부다. <댄서의 순정>의 철학은 “아즈바이가 숨쉬라는 곳에서 숨쉬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겠다”는 애원으로 요약된다.

<댄서의 순정>의 유일한 예술적 공헌이라면, 문근영이 몸을 날려 ‘그랑 알레그로’를 하는 특수효과를 과감히 삽입했다는 것이다. 매락없는 전개에 뜬금없는 퍼포먼스는 <댄서의 순정>이 진정한 예술적 모험을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음 문근영 영화에서는 어떤 예술적 모험이 시도될까? 벌써부터 두근두근 기다려진다. 다음에 문근영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사람은 반드시 철의 법칙을 숙지해두어야 한다. 참, 아마도 박건형은 <어린 신부>를 보고 또 보고 하지 않았을까? 그 느낌 그대로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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