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다닐 때면, 가장 골치 앓는 질문 중의 하나가 지명이다. 한글을
깨치고 나서는 표지판에 적힌 온갖 도시며 동네이름을 가리켜서 저게 뭐냐고 묻는데, 응 동네이름이야 저것도 동네이름이야, 하고 대충 넘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읍면동 특별시 광역시 보통시의 차이를 알려주냐 말이야, 하고 자기 변명을 늘어지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미군정보당국 손에
들어간 진주만 암호문처럼 뜻모를 기호지만, 지명은 때로 기억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아줌마 고향은 논개로 유명한 진주 남강 바로
앞동네인데, 그 지명에는 물살이 급해 동네 친구를 여럿 잡아간 의암바위, 아이들이 한두번씩은 다 빠져보았던 쏘풀밭의 똥통 등의 추억을 비롯해,
빤쓰 바람으로 뛰놀던 유년 시절의 한때가 고스란히 갇혀 있다. 갓 어른이 되었을 무렵엔 부산, 하면 여름방학마다 놀러갔던 해운대 해수욕장이
생각났고 경주, 하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고 배운 거 없었던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떠올랐다. 조금 시간이 지나 부산에 얽힌 추억도 부산영화제다
뭐다 해서 다양해졌고, 경주라는 지명에도 벚꽃놀이며 고속철도 논란이며 잡다한 곁가지 정보들이 끼어들었다. 그 정도였다.
90년대 들어, 지명을 둘러싼 풍경은 조금씩, 그러다간 아주 많이 달라지는데, 처음 그렇다는 것을 느낀 건 서해안에서 남해안을거쳐 동해안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여행을 했을 때였다. 한밤중에 영덕게로 유명한 어느 지방에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도시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보다도 ‘<그대 그리고 나> 촬영현장’이라는, 개선문만한 선전기둥이었다. 다음날, 영덕게를 삶아 파는 횟집에
들어갔더니, 벽이 온통 최불암씨며 최진실씨며, 그 드라마 출연진의 대형사진으로 도배돼 있었다. 거슬렸지만, 상술이 다 그러니까 트집잡지 않기로
했다. 가는 데마다, 어디어디 등장, 어디어디 출연 하는 플래카드며 네온간판이 지겹도록 눈을 놀라게 했는데, 미디어의 시대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현실논리보다는, 생각하기가 귀찮아서 생각하기를 관둬버렸었다. 부산시가 <친구>의 대박을 기려 ‘친구의 거리’를 조성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나 <신라의 달밤> 촬영 때 온 경주시가 나서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도, 역시 그랬다. 그러다가 <신라의
달밤>을 상영하는 극장 맨 뒷좌석에 앉고 나서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보고 경주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토착 양아치,
원정 양아치, 고교 양아치들이 개떼같이 얽혀 패싸움을 벌이는 불국사 앞마당을 ‘신라의 달밤’ 거리로 조성할 것인가? 범생이 깡패와 깡패 선생이
조우하는 룸살롱을 관광명소로 육성할 것인가? 왜들 카메라 앞에만 서면 그토록 큰 변 작은 변을 못 가리지? 맞는지는 모르지만, 제2의 부산이
되나 해서 흥분했던 경주시는 막상 이 영화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 끝에, 이제 어떤 도시, 어떤 장소마다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장동건이 칼 맞고 죽은 곳이래, 최불암이 영덕게 먹고 간 곳이래, 여기가
경주 유지들이 김혜수랑 뽀뽀하고 사진찍은 곳이래, 이렇게 추억하게 되겠다 싶어서 삭막해졌다. 개인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장소는, 자신만 알기에
초라하고, 그리하여 스스로도 돌아보지 않는다. 모모가 모모한 자리, 모모가 모모한 곳, 이 드라마, 저 영화가 만들어낸 신흥명소들이 매체와
매체 소비자의 메모리를 잡아먹어서 큰아이 탯줄을 묻은 시댁 텃밭 언저리나 젖니를 싸서 던진 지붕, 둘째가 떨어져서 어른들 간 떨어지게 만든
어느 개울을 돌아볼 여유는 없는 것이다.
몇해 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대박이 터지면서, 주인공 셋이 창을 하며 넘던 황톳길을 명소로 보존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담당기자한테 물어봐야 알겠지만, 농사짓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포장하기로 계획되었다가 명소보존한다고 계획을 취소하고, 그에
대해서 농민들이 반발하는,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걸작문화의 유산을 보존하거나, 문화생산활동에 관민이 일체되어 적극 지원하는
것이야 트집전문 아줌마도 박수갈채할 일이지만, 모든 것을 너무 쉽고 너무 단순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맘에 안 든다. 황톳길을 보존하기에
앞서, 주민들에게 통행편의를 위한 다른 보상책이 선결돼야 한다는 걸 주장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김혜수씨 얼굴을 보려고 벌떼같이 모여든
경주시의 고위공무원이나 지역유지 중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되겠는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궁금해한
사람은 또 몇이나 되겠는가, 싶다. 도대체 시대가 달라지기나 했나. 파괴하는 것만큼이나 보존, 육성, 지원도, ‘무턱대고’다.
영화? 음, 다섯번쯤 지루해하고, 두 주인공이 왜 라면집 처녀한테 그렇게 홀딱 반했는가를 열번쯤 궁금해하고, 열두어번쯤 킬킬 대고, ‘우리
편이 질까봐’ 서너번쯤 가슴 졸이니까 엔딩 자막이 올랐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 편’이 누구야? 말을 하고보니까 이상하네. 지방자치시대에 조폭도
토착조폭이, 중앙집중적인 전국조폭조직에 대항해서 탄탄하게 살아남는 것이 바람직한 일 아닌가? 전국이 한 조폭계보의 손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봐.
평소 아줌마 철학하고는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되잖아. 그럼 아줌마는 전국조직의 새끼보스인 주인공 이성재에 대한 전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마천수
편을 들어야 되는구나. 이긍, 세상 제대로 살기 넘 힘들다.
최보은 / 아줌마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