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데뷔한 신인들에게 연기상을 안기는가 하면, 두번 다시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비욕에게 트로피를 안기는 등 몇해 동안 ‘헛다리’만 짚어온
칸영화제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 같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로 올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누아 마지멜(27)은
아직도 수상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더욱 정력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목표의식만큼은 또렷했다. “난 상에 속지
않는다. 갑자기 출연 제안이 쏟아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기상은 영화의 역할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연기력에 대한 보상인 만큼,
한 종류의 영화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문화권의 영화인들과 일할 기회도 고대하고 있다.”
브누아 마지멜은 <왕의 춤> <마띠유> 두편의 출연작을 들고, 서울프랑스영화제를 찾았다. <피아니스트>에서
엿보기와 자해 같은 비정상적인 행위에서만 성적 흥분을 느끼는 피아노 선생을 흠모하는 학생을 연기했던 그는, <왕의 춤>과 <마띠유>에서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캐릭터로 분한다. <마띠유>에서는 아버지의 부당한 해고와 죽음에 복수를 결심하는 아들 역을, <왕의 춤>에서는
춤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표현했던 루이 14세를 연기했는데, 섬약한 유럽 청년에 불과해 보이는 그가 스크린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칸이 주연상을
헌사하고도 남을 만큼 비범한 데가 있다. “실존했던 인물을 연기하는 건 매우 흥미롭다. 내 경우는 어린 시절을 연구해, 그 인물의 열망과 고독
같은 비밀에 접근하려 한다. 자료를 토대로 많이 공부한다고 해서 거기에 묶이는 게 아니라, 한순간 백지상태가 되면서 매우 자유로운 비전을 갖게
된다.” 12편의 장편 상영작 중에 그의 출연작이 2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누아 마지멜은 최근 프랑스에서 출연작 3편을 동시에 개봉시키는
등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배우 중 하나다. “영화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고, 연기변신 폭이 크다”는 것이 실력파 감독들의 호출을 많이 받는
이유라고.
앳된 얼굴의 중견배우 브누아 마지멜은 12살에 데뷔해, 15년 동안 20편 정도의 영화에 출연했다. 아역배우 공모광고를 보고 ‘장난으로’ 응모한
것이 시작. 데뷔작 <인생은 길고 조용한 강의 흐름이다>가 크게 성공했지만 스스로 ‘배우’라는 자의식을 갖게 된 것은 한참 뒤다.
“평생 내가 해야 할 일이 연기”라는 확신이 든 16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연기에만 전념하게 됐다. “어려서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쳐야 했다. 한때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신을 꾀해야 했고, 4∼5년 전부터 선택권이 넓어져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는
“연극계 출신답게, 배우에게 공간과 시간 활용 여지를 많이 주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과의 작업”이며, “평생 가장 내밀한 영화”로 남았다는 것이
그가 성취감을 느끼는 대목. 칸영화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으니, 앞으로 ‘대중보다는 평단이 사랑하는 배우’라는 선입견을 어떻게 씻을 것이냐며
딴죽을 걸어봤더니, “작가영화라는 의미는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영화는 예술인 동시에 산업이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젓한 답변이 돌아왔다. 브누아 마지멜은 최근 서부극 장르를 현대적으로 비틀어놓은 대형 액션 <말벌의 집>에 출연했다며,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대중과 그리 멀지 않음을 강조했다.
사족 한 토막. 인터뷰 전날, 브누아 마지멜과 줄리엣 비노쉬가 뜨겁게 사랑하던 사이고, 둘 사이에 예쁜 아기까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조르주 상드와 알프레드 뮈세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 <세기의 연인>에서 함께 공연하며 실제로도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들의
사랑이 현재진행형인지를 묻고 싶었지만, 결례가 아닌가 싶어 “줄리엣 비노쉬의 팬”이라고 에둘러 운을 띄워봤다. 원하는 답을 얻어내진 못했다.
브누아 마지멜은 더도 덜도 없이 그냥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글 박은영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오계옥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