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개싸움이 끝난 뒤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투견장. 스무명은 족히 돼 보이는 검은 사내들의 집단 군무가 한참이다. 슬로모션으로 진행되는 이 군무는 단 한 사람이라도 박자를 놓치거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중단되고 마는 정교한 작업. 김선아와 공유가 함께하는 <잠복근무> 현장이다. 실전의 50% 속도로 이루어진 액션이 차츰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본격적인 테스트에 들어간다. ‘레디∼ 액션!’ 구호에 이어 이어지는 진짜 액션. 시멘트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 때리는 이의 기합소리와 맞는 이들의 신음소리로 세트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한결같이 험상궂은 인상의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낯익은 얼굴 공유가 나 홀로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잠복근무>의 못 말리는 히로인 김선아는 어디 있는 것일까. 뒤늦게 연습에 합류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슬슬 걱정스러워질 무렵 머리를 질끈 묶고 성큼성큼 어깨들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는 당당한 풍채의 김선아가 눈에 띈다. 그의 경우, 어제 한 차례 찍은 액션을 응용한 장면이라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제작진의 호언장담은 사실로 드러났다. 김선아의 빈자리를 메웠던 무술팀장의 간략한 상황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김선아, 발차기 몇번으로 몸을 풀더니 금세 빠듯한 군무에 적응했다.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쌈짱’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왔던 강력계 형사 천재인(김선아).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조폭 배두상파 일당을 검거하기 위해 부두목(김갑수)의 딸 차승희(남상미)에게 접근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고등학생으로 위장해 학교에 잠입한다. 그러나 등교 첫날부터 얼결에 쌈짱이 되고, 연하의 꽃미남 강노영(공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친하게 지내야 할 승희는 무시로 일관하고, 재인은 온통 싸움으로 점철된 학창 시절의 기억들을 통째로 복기하느라 하루하루가 고달프다. 오늘은 재인과 공유가 처음으로 한편이 되어 배두상파 일당을 상대로 통쾌한 대결을 벌이는 장면. 각개격투를 벌이던 두 사람이 등을 맞대는 것으로 액션신이 마무리될 것이다. 그 중간을 채우는 것은 장정의 얼굴까지 쭉쭉 뻗는 김선아의 호방한 발길질과 앳된 얼굴의 소유자 공유가 선보이는 박력있는 주먹질. 최대 관건은, 처음으로 같은 편에 선 이들이 마치 몇년을 함께한 동료처럼 척척 맞아떨어지는 호흡을 선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코미디와 액션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배우로 평가받는 ‘장군의 딸’ 김선아의 선굵은 액션도 볼 만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촬영장의 묘미는 이 범상찮은 배우와 감독이 벌이는 일촉즉발의 신경전. 박광춘 감독에게 배우에 대한 불만을 묻자 “할 수 있는데 자꾸 안 한다고 하는 것”이라는 솔직한 답이 돌아온다. 뒷자리에서 모르는 척 모니터를 확인하던 김선아, “갑자기 콘티를 만들어서 하라고 하면 어떡해요!”라며 끼어든다. “우리 감독님은 내가 못한다고 하면 ‘해. 슛 들어가면 될 거야’ 이러고 만다니까.” “그래서 결국은 했잖아요?” “아니∼(잠시 머뭇거리다가) 하긴 하지.” 씩씩한 여배우와 솔직한 감독의 옥신각신은 끝이 없다. 그러나 “더이상 못해”, “5분만 쉬었다 하면 안 돼요?”를 연발하다가도 난생처음 시도하는 와이어 액션을 성공시키는 김선아, 여배우를 와이어에 매달아 스무번 가까운 테이크를 밀어붙이다가도 어느 순간 현실적인 판단하에 OK 사인을 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감독을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갈등은 이 현장을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처럼 느껴진다.
이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지만 노주현, 박상면, 오광록 등 묵직한 조연들의 든든한 연기가 재미를 더해줄 <잠복근무>는 12월 중 크랭크업을 앞두고 먼지가 자욱한 세트장 안에서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다. 내년 2월 개봉예정.
사진 이혜정·글 오정연
△ 강렬한 직광과 스모그가 박진감과 비장함을 더해주는 현장. (왼쪽 사진) △ 쌈짱, 얼짱, 몸짱 삼관왕인 경인은 재인과 승희의 주변을 맴도는 비밀의 인물. 그의 정체는 영화의 마지막에 밝혀질 것이다. 한편 <동갑내기 과외하기> 때는 주로 맞는 역할이었던 공유는, 처음으로 때리면서 제대로 된 액션을 선보이는 것이 감개무량하다고. 그는 이미 <S다이어리>에서 김선아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오른쪽 사진)
△ 한줄 와이어에 의지한 김선아, 두세명을 한 호흡에 대적해야 한다. 도약 순간을 비롯, 액션과 관련한 전문적인 눈썰미를 필요로 하는 부분은 신재명 무술감독이 체크하지만, 편집으로 이루어질 흐름을 고려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감독의 몫. 완벽에 가까웠던 테스트 때를 기대하면서 19번까지 테이크를 진행하던 감독이 편집에 무리가 없는 수준에서 OK 사인을 내린다. 절권도와 태보 등을 통해 단련된 김선아. “거꾸로 떨어져서 다칠 뻔한 적도 있었지만, 하고나서의 뿌듯함은 말도 못한다”며 와이어액션의 즐거움을 설파했던 그이지만 대부분의 액션을 대역없이 한 호흡에 소화하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왼쪽 사진) △ <퇴마록> <마들렌> 이후 세 번째 작품을 선보이는 박광춘 감독. 호러, 멜로에 이어 코믹액션까지 언제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있는 그는 코미디든 액션이든 “타이밍과 리듬이 중요”하다면서 자기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강조했다. <말죽거리 잔혹사> <똥개> <친구> 등의 영화에서 새로운 액션을 선보였던 신재명 무술감독과 손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