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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드문 여성성장영화 <S다이어리>의 세 가지 미덕

<S다이어리>는 유쾌한 코미디이자, 드물게 보는 여성성장영화이다. 영화는 적어도 29살에 실연당한 지니에게, <내 남자의 로맨스>처럼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놈을 잡으라 강권하지 않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처럼, 곧 괜찮은 놈이 나타날 거라 위무하지도 않는다. 대신 ‘사랑이든 추억이든 새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너의 지난 사랑을 통렬히 반성하라’ 교시한다. 혹자는 그녀의 청구가 저열한 ‘섹스 피해의식’의 산물(정이현, <한겨레>, 2004. 10. 29)이며, 마지막 환불의 미온적 태도야말로 불철저한 각성의 징표(김은형, <씨네21> 476호)라고 쏘아붙이기도 하지만, 이는 전투적 페미니즘의 경직된 태도에서 기인한 오버로 간주된다.

이 영화에는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이 있다. 첫째, 연애관계 속에 포함되는 자연스러운 섹스를 도외시하지 않고, 둘째, 낭만적 사랑과 성애적 관계를 외화(外化)시켜 보여주며, 셋째, 복수의 과정을 통해 남성성의 한계와 자가당착을 폭로한다.

섹스하라, 단, 피임을 잘하라

로맨틱코미디는 물론이고 심지어 멜로영화에 이르기까지, 그간 한국영화에서의 ‘섹스 기피증’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키스가 고작이거나 그나마도 좌절되기 일쑤였으며, 섹스 앞에서는 꽤나 한참 동안 ‘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망설이는데, 그 망설임은 대개 여자쪽에 기인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부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여성은 혼전섹스를 원치 않거나 은근슬쩍 빠져나가려는 자로 그려졌다. 여성이 연애관계에서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연애감정과 무관한 섹스가 아니라) 섹스를 자연스럽게 향유하는 영화는 <청춘> <바이 준> <색즉시공> <마들렌>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등 몇몇이 손에 꼽히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조차 태반은 원치 않은 임신으로 귀결된다. ‘섹스하면 낙태한다’는 무식한 교훈을 설파한 셈이다. 때가 어느 때인데, ‘섹스하라, 단, 피임을 잘하라’는 진보적인 성교육이 가정과 학교에서는 물론 영화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S다이어리>는 내러티브를 통해서는 물론, 아예 엄마의 입을 통해 위의 강령이 교시된다. 초경을 시작한 딸에게 “이제 너도 사랑할 나이가 되었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렴…” 하며 연애를 장려할 뿐 아니라, “내 딸의 성생활까지 관리하여 드느냐? 걱정되면 콘돔이나 넣어주라”는 파격적인 성윤리를 설파한다. 딸은 엄마의 성(姓)을 땄으며, 아버지와 부계 친척이 전혀 나오지 않는 등 가부장제 질서 외부에 있는 모녀(아마도 미혼모의 딸인 듯)임이 암시된다. 이러한 탈가부장적 관계가 새로운 성윤리의 기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녀가 원한 것은? 낭만적 사랑 vs 성애적 쾌락

그녀는 애인으로부터 절교선언을 듣는다. 그녀의 무수한 애정표시에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니, 줄 줄도 모르지, 난 내 사랑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절대로…”라 확신한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낭만적 사랑’은 그녀만의 판타지였음이 드러난다. 세명의 옛 남자들은 그녀에게 사랑과 추억을 추인해주기는커녕 그녀와의 재회를 몹시 곤혹스러워하며, “욕정”이었거나 “내 몸이 그리운…”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했던 ‘사랑’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서로 주고받으며 즐거워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낭만적 사랑’은 성애적 관계를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인격적인 교감의 총체이다. 그런데 이 ‘낭만적 사랑’에서 전인성과 상호성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나? 육체성과 일방성이 남는다. 즉 ‘일방적인 육체관계’가 된다. 일방적인 육체관계는 강간이거나 매매춘이다(“성직자는 돈으로 여자를 사지 않는다.” “그럼, 힘으로 범하는 것은 괜찮구요?”). 그녀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고 믿어왔지만, 그것이 상대방에 의해 부인된 사태에서, 그것이 다만 ‘지불되지 못한 매매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애초 그녀의 언어도 아니고, 정말 몸서리처지게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이지만) 직시한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논리 그대로 청구서를 쓴다. (그들의 논리가 매매춘이므로 그녀는 낭만적 사랑의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다. 따라서 김은형이 지적한 코디비용이나 정신적 위자료는 청구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그들에 의해 척살된 사랑의 부고장이 끝끝내 부인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낭만적 사랑이 맞았다고, 복권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사랑과 추억을 되살리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의식으로 무장한 채 각자의 허장성세 속으로 숨는다.

남자들이 숨어든 곳, 자기 묘혈(墓穴)을 파다

남자들은 세 가지의 외부의 힘 속에 자신을 의탁한다. 종교와 권력과 엄마가 그것이다. 그녀는 민·형사상의 소송에 의거하며, 즉 보편적 법질서에 의거하여 그들을 단죄하고 배상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봉하는 윤리와 논리를 고스란히 되돌려줌으로써 (‘Echo’의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복수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그들의 한계를 적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과 추억을 추인하고 복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임을 자각한다.

첫 번째 남자는 신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한다. 그는 외부의 윤리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하면서도 정작 관계 내부의 윤리에는 소홀하다. 그는 그녀를 그녀가 납득할 수 있는 (낭만적 사랑의) 윤리로 설득하지 않는다. 그는 ‘욕정의 노예’라고 단정한 바로 그 논리로 단죄된다. 그녀에게 얇은 옷차림으로 먼저 유혹했다고 말하던 그는 수많은 여성신자들로부터 유혹받느라 괴롭다. 끊임없이 ‘욕정의 노예’임을 고해해야 하는 그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죄인이 된다. 두 번째 남자는 사회적 권력에 의탁한다. 그는 폼나는 탈것을 끔찍이 사랑하는 자기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결정적으로 ‘비리 사진’에 항복한다. 그가 신봉하는 공권력으로부터 단죄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남자의 약한 고리는 엄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오이디푸스적 엄마로부터 독립하지 못했고, 그는 엄마를 통해 길들여진다.

그들은 모두 뻔뻔하고 무심한 자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보다 약한 자들이다. 그녀는 사랑주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투여하고 맞추려 했지만, 그녀의 행동과 판단의 근거는 그녀 내부에 있었다. 그녀는 신, 사회적 권력, 그리고 엄마로부터 독립적이다(그녀는 대학 때부터 카드비를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성생활은 재수할 때부터 자율적이었다). 자율적 주체인 그녀는 자신의 20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환상을 가로지른다.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산산이 부수고, 물색없는 사랑의 욕구를 깊이 반성하며, 이제 한심한 그놈들마저 관계의 우위에서 ‘자발적으로’ 용서하고자 한다. 그리고 파손된 추억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복원한다. 마지막 ‘그놈들의 애틋한 에피소드’는 그녀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그녀 자신에게 내미는 자기긍정의 악수이다. 그녀의 30대는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고 당당할 것이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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