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새벽, 좋은 음악, 오래된 사람들
‘선생님’과 함께하는 음악감상 <전영혁의 음악세계>KBS 쿨FM(89.1MHz) 매일 02:00~03:00
KBS 본관 사옥의 미로 같은 구조, 오래된 건물이 전하는 낡은 느낌,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선 녹음 스튜디오의 깊은 공간감. 이 세 가지가 정말 신기하게도, 사실 이것들과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전영혁의 음악세계> 특유의 분위기와 꼭 맞아떨어진다. 일반 청취자들이 소통하기 쉽지 않다는 것. 다른 이름으로 1986년 4월29일 첫 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 쌓인 세월. 대중적이지 않고 음반도 구하기 어려운 좋은 음악들을 알린다는 원칙에서 선곡되는 다양하고 깊은 음악들. 그 특성들을, 물리적 공간이 닮았다.
80년대 초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외국음악 정보지 <월간 팝송> 편집장이기도 했던 DJ 전영혁(그의 애청자들은 그를 선생님으로 부른다)과는 녹음 도중 틈틈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어렵지 않다.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오프닝멘트를 비롯해 어떤 종류의 멘트도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까. 작가도 없다. 이 프로그램에서 DJ는 앨범과 아티스트와 곡목을 수식어 없이 최소한의 정보로만 전달한다. 대부분 개인 소장 CD들에서 곡을 발췌한다며, 이날도 집에서 한 아름 CD를 싸들고 온 그가 간결한 멘트를 마치고 기자의 질문을 조용히 기다린다. 청취자들에게 편견이 될 정보는 최대한 배제하고 음악 감상에 집중하는 것이 이 방송의 원칙이자 틀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최초 전신은 <25시의 데이트>다. 이 방송은 <월간 팝송>의 독자로서 그를 기억해온 청취자에게나,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해외 음악에 목말라 있던 청취자들에게 시작부터 단비 같은 존재였다. 메탈리카, 팻 메스니, 잉베이 맘스틴 등이 이 방송을 거쳐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세번 방송명을 바꾸고, 1996년 SBS로 옮겨갔다가 99년에 다시 돌아오는 불규칙한 시기가 있었어도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국내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으로선 독보적이라 할 만큼 짙은 마니아적 성향을 고집해왔다. 멘트 대신 시를 들려주는 이 서정적인 프로그램의 오랜 열혈 애청자들도 그를 닮았다. 한 방송에 대한 쉼없는 애정은 그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깊게 했고, 아름다운 커플을 낳기도 했다. 1년에 몇번씩 스무명 내외의 멤버들만 골라 자기 집에 초대해 음악감상 시간을 가진다는 그.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악수를 청하자 “손이 차가운데…”라며 선뜻 손을 내주지 못하던 DJ는, 다시 생각해도 꼭 이같은 곳에서만 볼 수 있을 사람 같았다. 미로 같은 길 위에서 오래된 느낌을 따라 걸어가면 닿게 되는 깊은 공간 저 안쪽에, 아주 오래된 지인들과 그저 몇 마디를 친밀하게 나누고 있을.
전영혁 인터뷰
“우리 방송에는 시제가 없다”
긴 음악들을 한곡도 아니고 서너곡씩 붙여서 내보내는 동안 뭘 하나.
선곡에 기준이 있는데, 1차적으로 내가 듣고 좋아하는 곡, 2차로는 그중에서도 청취자가 들어도 좋아할 수 있는 곡이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가져와 CD를 올려놓으면 그게 내가 세 번째 들을 때다. 그 곡을 소화하기 위해, 음악이 나가는 동안 나도 듣는다.
애호하는 장르가 있나.
그런 건 없다. 우리 프로그램은 전 장르가 다 나간다. 난 음악엔 장르가 없다고 생각하고 좋은 음악은 하나라고 믿는다. 음악 자체는 장르를 나눌 수 없다는 게 내 주관적인 의견이다. 잘 만들어진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이 있을 뿐이다.
오프닝멘트를 왜 하지 않나.
방송을 죽 듣다보면, 예를 들어 개천절이다 그러면, 방송에서 하루종일 “오늘이 개천절인데요” 하면서 시작한다. 판에 박히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 방송은 처음부터 시제가 없었다. 요즘은 다시 듣기 서비스도 되니까, 언제 무슨 날인지 모르고 들어도 상관없게, 완전히 음악만을 위한 방송이 되게 하려고 한다. FM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FM이 AM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처음 생길 때 슬로건이 ‘less talk, more music’이었다. FM은 청취자가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SBS에서 KBS로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SBS로 가게 된 계기도 묻는 건가. (웃음) KBS에서 1시에서 3시까지 하던 시간이 다른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2시에서 3시로 옮겨지게 됐다. 그때 SBS에서 그 시간대를 보장해주겠다고 했고, 청취자를 위해 옮겼다. 그런데 KBS 라디오국장이 바뀌면서 방송시간을 12시로 옮겨주겠다고 파격적으로 제안했다. 2시간에서 1시간으로 줄어드는 것이었지만 시간대 때문에 다시 오게 됐다(7개월 뒤, 방송시간은 다시 2시대로 옮겨졌다. 편집자).
DJ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게 제일 어려운 문제다. (한참 생각한 뒤) 사실 나는 DJ가 될 줄 몰랐다. 음악은 무척 좋아했지만. 그런데 KBS의 박재권 국장이 FM 국장으로 오면서 음악 프로그램을 새로 편성하는 데 DJ 중에 음악전문가가 한명도 없다며 나를 불렀다. 그런 욕심으로 시작했다. 세상엔 좋은 음악이 많은데 왜 라디오에는 안 나올까. 그런 음악을 틀어주자. 하지만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