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은 <화씨 9/11>과 세 가지 점에서 닮았다. 첫째 미국의 건국이념은 곧 죽어도 휴머니즘에 기초해 있다는 어린애 같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고, 둘째, 외국인들에 대한 삼엄한 경계는 필수적인데 거기에 여전히 틈새가 많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셋째 ‘악’을 체제가 아닌 인물에 집중시켜 증오의 표적으로 삼는 의인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다. 현실을 재료로 픽션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씨 9/11>과 세트로 지은 가짜 공항이 표상하듯 완전한 허구를 현실인 양 믿게 만드는 <터미널>의 전략은 정반대로 향하고 있으니까. <터미널>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세상에… 지금 장난하나? 난민이었던 이란인의 11년간의 ‘자기-분열적’ 세월을, 일시적 무국적 상태인 가상(!) 동유럽인의 9개월간의 ‘사회-친화적’ 시간으로 윤색하고선, 감히 ‘실화 바탕’을 운운하다니!
미국이라는 거대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국장 캐릭터로 의인화하다
외국인에게 입국절차 까다롭기로 유명한 지엄하신 미국의 문턱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 외국인이 어떤 ‘공황(!) 상태’를 겪는지는 영화가 환기해주는 이상으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은 말을 보탤 필요도 없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이 유색인종이라면 거기에 한술 더 뜰 테고. 그런데 영화는 이 자명한 사실을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매우 스페셜한 설정을 가져온다. 그는 현실에 있지도 않은 ‘코라코지아’에서 왔으며, 그 나라에 쿠데타가 났다는 것이다.
애초에 미국이 나라 같지도 않게 생각하는 나라(<화씨 9/11>에서 언급된)도 많고, 미국과 연루된 전쟁을 겪는 나라도 부지기수인 현실에서, 영화는 그런 현실이 주는 불편함을 몰아낸다. 현실의 무게가 없는 가공의 나라로, 그나마 동유럽이면 양반이며, 그 나라는 평소에는 미국과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그때에, 그것도 미국과는 무관한 순전히 자국문제로 그가 난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교묘한 설정이 주는 효과는 명백하다. 첫째, 마치 이런 비극이 현실의 것은 아니라는 듯한 ‘이중 속임수’(진실을 말하면서 거짓인 양 말하는)를 구사하고, 둘째, 이 억류가 결코 미국의 책임은 아니라는 ‘면피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이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배타적이고 오만한 미국의 출입국 관리시스템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내의 지독히도 ‘운없음’에 기인한 것인데, 첫째는 하필이면 그때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고, 둘째는 하필이면 ‘그런 놈’을 만난 것이다. 영화는 미국의 출입국 관리시스템의 엿 같음을 오로지 한 사람으로 의인화한다. 국장의 행동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책임을 떠맡기 싫다”며 복지부동의 현명함을 설파하던 그가 곧이어 아랫사람들도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의 개인성까지 드러내며 그에게 적대적 관심을 쏟는다. 일부러 일자리를 만들고 일일이 감시하며, 나중엔 이쁜이더러 그를 만나는 이유와 깡통의 의미까지 캐묻는다. 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 있을까? 제 입으로 뒤 닦는 휴지 운운하며 상대도 안 된다는 그는 도무지 뭐가 아쉬워서 “아무것도 아닌 자”와 일대일의 신경질적 대결상황을 만들고, 나중엔 문제없는 서류조차 승인을 거부하며, 그에게 ‘바로 내가 너를 막는다’는 악감정을 쌓는단 말인가? 말로는 그에게 “이게 게임인 줄 아냐?”며 윽박지르면서도, 자기야말로 게임으로 즐겼다는 듯 마지막 공항 문 앞에서 ‘에이 아까워라’는 표정을 짓는 그의 미스터리한 행동들을 과연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아마도 병적 히스테리 환자이거나 그에게 개인적으로 매료되고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알리고 싶어하는 (스토커 성향을 지닌) 남자 (아마도 게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는 오로지 개인적으로(!) 미쳤을 뿐 전임자는 그와 같지 않아서 나보스키로부터 인간성을 배우라며 치료 혹은 교육적 멘트를 날리기도 하며, 그의 아랫사람 역시 그와 같지 않아서 명령에 보란 듯이 불복한다. 하기야 그는 이미 권위가 없어졌으니, 명령이 안 먹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관료사회 지휘관이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짓, 즉 자신의 생생한 속내를 부하직원들에게 드러내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체제의 폭력을 한 사람의 신경질로 환치시키는 거룩한 뻔뻔함이라니! 하기야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대걸레 대 비행기의 당랑거철(螳螂拒轍) 삽화가 이미 영화의 스타일을 해명(?)하고 있지 않은가? 노인이 비행기와 맞장뜰 수 있듯이, 낙천적이며 기다릴 줄 알고 속이지 않는 한 외국인이 미국이라는 체제의 성벽과 맞설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고픈 감독은, 거대한 체제의 모순에 주목하는 대신 이를 단 한명의 신경증 환자로 맞바꿔치기한다. 어차피 그의 세계에서는 대걸레와 비행기도 대응 가능하므로, 체제 대 개인이 대응되고 치환된다 한들 안 될 게 없다.
거짓 동화는 그만!
영화가 전하는 또 하나의 대단한 허구는 그들이 나보스키를 한결같이 통일된 개인으로 이해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이에 비하면 ‘9개월 만에 영어회화 마스터하기’는 애교에 가깝다). 이것이 얼마나 기적적인지 박찬욱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여섯개의 시선> 중)를 보면 확연해진다. <믿거나…>에서 찬드라는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해도 아무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조차 제멋대로 붙여져 이리저리 보내지고 책임의 행방은 몇 바퀴를 돌아 묘연해진다. 그녀는 미치광이로 분류된 채 어떤 책임자도 대면하지 못하고 6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녀는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 무릇 가해자는 얼굴이 없는 법이다. 광주학살이나 <블러드 선데이>에서 보듯이, 맞은 사람은 있어도, 쏜 사람은 없다. 원수를 갚자는 게 아니라 제발 누군지나 알자고 수십년을 싸워도 가해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터미널>에서 자신이 가해자라고 시종 얼굴을 디미는 국장은 뭔가? 배후의 더 큰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자폭하는 가미카제가 아닌가?
조악하고 작위적인 설정일망정 감독은 이쁜이를 그와 만나게 하기 위해 ‘외로운 사랑’이라는 우울한 훈장을 그녀 가슴에 달아주었다. 그러나 감독은 최소한의 장치나 성의도 없이, 국장이 그에게 품는 불가해한 애증을 무작정 들이댄다. 체제를 의인화하여, 국장에게 미국의 배타성/폭력성/오만함 등을 투사시키고, 그것을 오로지 개인성의 차원으로 국한시키는 <터미널>의 태도는 단순히 치졸함이나 비겁함을 넘어 교활하고 사악하다. 더욱이 이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미국이 나보스키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사랑한다며 거짓 동화를 나불대는 팍스 아메리카니즘의 낯짝은 차마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