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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오브 파나마
2001-06-19

테일러 오브 파나마

■ STORY 파나마운하가 본국으로 반환된 이후 영국 정부는 스파이 앤디 오스나드(피어스 브로스넌)를 현지에 파견한다. 그는 크게 한건 올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뒤 스파이 생활에서 은퇴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오스나드는 거물급 인사들과 접촉이 많은 양복점 재단사 해리(제프리 러시)에게 접근한다. 재단사로 성공해 아름다운 아내와 살고 있지만 해리는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 오스나드는 그의 약점을 쥐고 협박해 해리에게서 조금씩 정보를 빼내기 시작한다. 양심의 가책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해리는 거짓 정보를 오스나드에게 주고, 오스나드는 이 정보를 이용해 거액의 돈을 벌어들일 결심을 한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차츰 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 Review

‘그는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소설이 있는 오두막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이런 아름다운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에선 좀더 엉뚱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양복점 재단사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가족들에게 맛있는 아침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할리우드에서 나온 엇비슷한 장르영화 중에서 유독 한눈에 들어온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최근 제작된 할리우드 스릴러영화 가운데서 이만큼 고풍스러운 기품과 싸늘한 냉소를 겸비한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이국적인 풍광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운하의 나라 파나마다. 여기엔 알 수 없는 정열과 리듬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여인들은 늘씬한 몸매로 거리를 활보한다. 도시 저편엔 거대한 밀림이 도사리고 있다. 얼핏 보기엔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런데 이면은 좀 다르다. 부패한 정치인, 권력을 둘러싼 음모,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 복잡하게 잔뜩 뒤얽힌 공간에서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 하나 있다. 어리숙해 보이는 외모의 해리 펜델. 그는 양복재단과는 전혀 거리가 먼 과거를 슬그머니 감춘 채, 재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절반 정도는 사기꾼인 인물이 영국 첩보원과 마주치면서 사태는 기이하게 흘러간다. <트루 라이즈>의 새로운 버전인가? 아니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기존 할리우드의 첩보 스릴러물, 특히 시리즈를 부드럽게 희롱하고 비튼다. 여전히 피어스 브로스넌은 기존 첩보원 캐릭터를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다. 매력적이며 섹시하고 여성에게 인기만점이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렇게 멍청하고 부도덕한 인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할리우드 영웅상이 얼마나 교묘하게 조작된 것인지, 그리고 허점투성이인지를 보여주는 거다. 영화에서 어느 파나마인은 그를 ‘악마’라고 부르는데, 별로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비욘드 랭군>과 <제너럴>의 존 부어맨이 연출했다. 존 부어맨은 영화 초반부를 꽤나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느린 박자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인물들은 실내에서 유연하게 움직인다. 영화의 리듬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와중에 인물들의 심리는 빠짐없이 노출되고 있다. 특히 과거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해리는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죽은 이에게 처지를 호소하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으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필립 러셀롯은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한 기운 가득한 영화 속 공간을 자로 잰 듯 꼼꼼하게 포착하고 있다. 뛰어난 촬영술과 분위기 있는 라틴음악이 요란한 총격전 하나 없는, 이 밋밋하기 그지없는 스릴러영화를 밀고 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존 부어맨 감독은 여느 감독작에서 그랬듯 문명, 그중에서도 미국사회에 대한 위풍당당한 냉소를 감추지 않는다. 할리우드영화 비틀기는 물론이고 그들 정치체계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을 들춰내고 있다. 이야기의 매듭이 다소 어설프게 느껴지는 대목도 눈에 띄긴 하지만.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부어맨의 전작인 <제너럴>의 연장선상에 있다. 도둑질과 협잡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숨겨진 진실찾기 게임을 관객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의 답은 어렵지 않다. 모름지기 뚱뚱한 사람이라도 그럴싸한 양복을 걸치면 타인으로부터 신사대접을 받는 법. 주인공 해리가 손님들에게 양복을 맞춰 입히는 것은 곧 세상의 추함을 슬쩍 감춰주는 행위에 해당하는 셈이다. 존 부어맨 감독은 해리라는 인물에게서 그 ‘덮어줌’의 행위를 부정하게 함으로써 세상과 맞서도록 한다. 요컨대 자신의 공포와 위기의식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몽상을 스스로 지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목요연하면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할리우드영화를 본 기억은, 최근 무척 드물었던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감독 존 부어맨 자연과 문명 사이의 진실을 찾아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돈을 찬란한 빛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돈으로 만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존 부어맨은

자신의 말을 언제나 현실로 만들지는 못했다. 영국 출신의 존 부어맨 감독은 할리우드로 건너와 <자르도즈>와 <엑소시스트2>(1977) 같은

범작을 만들어 흥행에서 쓴맛을 본 바 있다. 이후 존 부어맨의 행보는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그는 <테일러 오브 파나마>에서 보이듯 여전히 할리우드

주류영화계에서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독특한 인물이다. 아마도 존 부어맨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것은 각종 국제 영화제의 격려도 한몫 한 것 같다.

<제너럴>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말이다.

존 부어맨의 영화는 언제나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선과 악은 구분될 수 있는가? 어떤 연유로 인간들은 사소한 거짓말을 일삼는가? 두려움없이

‘진실’의 칼자루를 뽑을 사람은 누구인가, 등등. 존 부어맨 감독의 출세작은 <포인트 블랭크>(1967)였다. 리 마빈이 주연한 이 스릴러영화에서

존 부어맨은 플래시백 기법을 도입해 차츰 범죄세계로 빠져드는 개인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가감없이 담아냈다. 이후 할리우드로 건나간 감독은 <서바이벌

게임>을 만든다. 네명의 사업가가 카누로 강을 여행하는 도중에 살인마와 대적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죽음과 거짓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인물들

모습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존 부어맨 감독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노출한 작품이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휘황한 꿈 대신, 암울한 절망을 발견한 것이다.

<엑스칼리버>(1981)은 부어맨이 신화의 문제, 그리고 엑스칼리버라는 칼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진실’의 문제를 다시금 논한 작품이다.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의 전설을 다룬 이 영화는 혼란과 광기, 그리고 폭력의 조합을 웅장한 서사극으로 재현한 것으로 칸 영화제 예술공헌상 수상작이다.

예측불허의, 그리고 끊임없는 혼란에 갇힌 인물들이 곧잘 영화에 등장하는 점은 마치 존 부어맨 자신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차기작으로 어떤 영화를 들고 나올지 알 수 없는, 흥미로운 괴짜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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