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 지체와 퇴행의 힘을 보다
역시 아이들을 위한 영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일까.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보는 동안 옆자리의 꼬마는 쉼없이 하품을 하다 잠들어버렸다. 심지어 영화가 끝나자 뒷자리의 아이는 외쳤다. “그럼 영화는 괜히 본 거잖아!” 아이의 투덜거림에는 디즈니적 스펙터클과 해리 포터적 판타지의 결여에 대한 심한 배신감이 묻어났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건 내 맘속에 일렁이는 의혹이다. 흐느낌이 새나가지 않도록 연신 입술을 깨물던 나조차 ‘조카들에게 보여주기엔 너무 가혹한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이 영화 속 아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미디어가 현실을 번역할 때 흔히 쓰는 완곡어법의 거름종이로도 그 참혹함이 여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취한…>은 더욱 소중한 성장영화다. 날것의 현실이 보여주는 참혹함은 미디어의 기름진 수사학에 전 우리의 알량한 휴머니즘을 가차없이 베어버리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려 깊은 성장영화는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한 발짝 성장할 수 있다는 엄혹한 생존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극복이 예상되도록 맞춤서비스된 곤란을 설정하고 미리 주문된 주변의 배려 속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를 가정하는 영화는 성장(成長)이 아니라 ‘성장’(盛裝)에 관한 영화다. 부르주아적 성인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우아한 지적 복식인 도덕적 휴머니즘의 착용법을 가르치는 영화. 흔히 지배적 성장영화는 이성에 대한 생물학적 호기심과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대한 혼란과 갈등, 어른들이 망각한 어린이만의 방언과 몽상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요리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세 가지 성장영화의 구성요소 중 어느 것도 만족시키지 않는다. 하물며 <집으로…>의 상우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외할머니)도 없다. 여느 성장영화와 달리 이들에겐 극소량의 판타지조차 끼어들 틈이 없다. 이들에겐 빌리 엘리어트가 팍팍한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인 예술의 판타지조차 없다. <취한…>은 동정 없는 세상과 판타지 없는 아이들이 벌이는 냉혹한 결투다.
그러나 생존의 전투로 점철된 이 아이들의 삶이 미디어의 숲에 포박된 도시아이들의 삶보다 강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 속 아이들에게는 미디어의 판타지가 없다. 근대사회는 슬럼가와 산골의 아이들에게도 시청각적 판타지를 선물했다. 오늘의 아이들에게 미디어가 매개하지 않는 날것의 현실은 섬뜩하고 낯설다. 진짜 곰보다 테디베어를 먼저 보며 큰 아이들은 막상 동물원의 곰을 보면 자지러진다. 아이들의 꿈은 미디어라는 세련된 거간꾼을 통해 유통된다. 꼬마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연예인인 것은 미디어가 생산하는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를 연예인이 뿜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한…>의 아이들에게는 미디어가 매개하는 판타지가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동생이 퇴행성질병을 앓아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수술비는커녕 생활비도 없다는 것, 그들을 도와줄 이가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조한 사실뿐. 그러나 이 아이들은 한점의 판타지도 없는 세상에서, 칭얼거림도 냉소도 없이, 어른들보다 더욱 처절하게 스스로를 책임지며 자유를 향한 문턱을 넘는다.
근대의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문화적 장치는 미디어이다. 미디어를 껴안고 뒹구는 우리의 아이들은 미디어 덕분에 행복해졌을까. CF에 등장하는 장난감이 내겐 없음을 알았을 때, 우리집이 TV에 등장하는 전원주택보다 좁고 허름함을 알았을 때, 아이들은 처음으로 불행을 느낀다. 중동영화 가운데 유독 아름다운 성장영화가 많은 이유도 그들의 반근대적·공동체적 문화 탓이 아닐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마드를 단 하루 만에 오만배쯤 성장시키는 힘은 자신의 업무를 지체시키는 끊임없는 날것의 자극들이었다. 처음 보는 아줌마의 빨랫감을 줍느라, 평생 대문을 만들어온 할아버지의 인생역정을 들어주느라, 아마드의 여정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집으로…>의 상우도 게임기의 배터리가 다하고 나서야, 즉 미디어와 완벽히 단절되고 나서야 외할머니의 간절한 묵언을 읽어내지 않는가. 성장의 당위에 강박된 아이들에게도, 더이상 성장하지 않음으로써 변화를 멈춘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성장을 향한 무한질주가 아니라 나의 욕망이 아닌 것들에 곁눈질하게 만드는 소중한 지체와 퇴행의 힘이 아닌지.정여울/ 미디어 헌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