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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벗는 <봄날은 간다>
2001-06-15

아득한 사랑의 롱테이크, 외롭고 높고 쓸쓸한

■ 허진호 감독의 신작 <봄날은 간다> 제작 이야기

7일 밤 9시 서울 상봉터미널 버스승강장 앞. 채 식지 않은 버스 엔진과 한껏 밝힌 조명기가 뿜어내는 열기가 만들어낸

후텁지근한 밤공기 속에서 50여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 후반부 촬영이

이뤄지는 이곳 풍경은 여느 촬영장의 그것과는 자못 다르다. 아무리 촬영 준비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감독의 고성이나 스탭들의 웅성거림,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볼 수 없다.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들릴 듯 말 듯 귀를 스쳐갔고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만 엷은 정적 속을 맴돌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감독을 닮는다’는 속설에 비춰보면 감독의 성격을 어림 짐작할 수 있었다.

감독과 배우가 함께 ‘소곤소곤’

이날 찍을 장면은 강릉 집으로 내려가려는 은수(이영애)가 배웅나온 상우(유지태)에게 짧다면 짧았던 사랑의 감정을 접고,

‘그저 친구로 지내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하는 부분.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찍는 데 있어선 집요하기로 소문난 허 감독이 어떤 장면인들 쉽게

찍으랴만은, 둘 사이의 감정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신이라 미묘한 감정 표현이 관건이었다.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는 알

듯 모를 듯한 긴장감이 가득 차 있었다. 허진호 감독은 신이 벌어질 승강장 앞 벤치에 두 배우를 앉혀놓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두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어 허 감독은 연기 리허설 모습을 모니터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배우들에게 다가가

무어라 얘기를 했다. 때론 배우들을 모니터 앞에 앉혀놓고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이들 셋은 가까이 서 있어도 들릴 듯 말 듯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영애는 대사를 이렇게 하는 게 좋겠냐, 저렇게 하는 게 좋겠냐며 감독의 의견을 물었고 유지태는 은수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라는 대사가 이미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느낌을 준다며 편하게 자신의 대사를 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전하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수차례의 리허설과 테스트를 거친 끝에 밤 11시5분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예상했던 대로 촬영보다 배우와 감독 사이의 토론에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한 끝에 결국 다음날 새벽 1시쯤에야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 오케이 사인이 이날 일정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어질 촬영을 위해 촬영부와 조명부는 부지런히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고 연출부와 제작부 등 기타 스탭들도 분주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최종 촬영분에 들어간 장면이 애초 리허설 때와는 미묘하게 달라진, 새로운 버전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고보니

매 테이크를 갈 때마다 조금씩 배우의 대사와 연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영애가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라는

대사를 할 때도 한번은 승강장을 서성거리며, 한번은 유지태의 옆자리에 앉아서, 또 한번은 유지태 옆의 옆자리에 앉아서 처리했다. 이런 작은

움직임 하나를 연출하기 위해 감독과 배우들은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나란히 앉아 속닥속닥 서로의 느낌을 나눴고, 그동안에도 시간은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김선아 프로듀서는 촬영이 시작된 2월25일부터 매일같이 겪는 일이므로 대단치도 않다며 “이 영화에서 허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주인공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므로, 느낌이 그에게 와닿지 않으면 대사와 연기를 계속해서 바꿔간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우리 영화엔 왜 쉬운 게 하나도 없냐’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시나리오 따로, 촬영 따로

사실 이 영화에 ‘지속적인 변화’는 운명인 듯 보인다. 애초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떠올린 것은 1999년. 당시의 구상은 주인공이 녹음기사였다는

점 빼놓고는 지금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비록 5장짜리 시놉시스에 불과했지만 영화가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된 것은 지난해 2월쯤이었다.

이때부터 허 감독은 전라도, 강원도 등지를 돌며 주인공 상우처럼 소리채집 현장을 돌아다녔고 연출부원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만들어나갔다. 지난해

9월 첫 원고가 나왔고 이후 수정을 거듭한 끝에 촬영 직전인 2월20일쯤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완성’이라고는 하지만 현장에서의 촬영은

꼭 시나리오를 따라가진 않았다. 허 감독은 콘티없이 촬영장으로 와 그곳의 특성과 배우들의 호흡에 맞게 장면을 끊임없이 바꿔나갔다. 그것도

매우 느린 속도로 아주 조금씩. 게다가 허 감독의 경우 ‘이런 식으로 가자’며 미리 정해놓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어딘가 이상한데…’라며 그 이상한 부분을 찾아낼 때까지 고민을 거듭하는 스타일인지라 하염없이 촬영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또 대부분의 장면이 1∼2분에 달하는 롱테이크이다보니, 한 장면 안에서도 감정선이 잠시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만 3개월하고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전체 분량의 70%가량을 찍었다는 것이 오히려 고무적이기도 하다.

물론 ‘7부능선’을 돌파한 지금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영화 속 은수의 근무처인 강원도 한 방송사에서 촬영할 때는 시나리오에

없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설정하고 만들어나가다 보니 배우, 스탭은 물론이고 감독 스스로도 녹초가 됐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벚꽃, 개나리 등 봄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미리 촬영을 해야 했다는 점도 부담이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강행군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시가 촬영 초반인지라 배우들의 감정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 또 감독의 취향이 때깔이 번지르르하고 현대적 냄새가 물씬한 것보다는

고질고질하고 정겨운 것을 선호하는 쪽이라 촬영 장소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감독이 생각한 상우의 집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갖춘

한옥인지라 연출부와 제작부는 이를 물색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가까스로 느낌이 좋은 집 한채를 발견했지만 그나마 맞은편 주택이 재건축을

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고, 다시 힘들여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부암동의 한 주택을 빌릴 수 있었다.

<봄날…>을 밀고가는 ‘3인의 무사’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표’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허진호만의’ 영화는 아니다. 특히 촬영감독 김형구, 조명감독 이강산, 동시녹음기사

이병하 등 ‘3인의 무사’는 이 영화의 중추 역할을 담당한다 할 수 있다. <무사> 때 한팀을 이뤄 활동했던 이들은 영화 스타일면에서나,

감독의 성격면에서나 대조적인 <봄날은 간다>에 참여하고 있다. 역동적인 액션장면으로 가득한 <무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영화가 쉽게 느껴질 법도 한데, 이들은 꼭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김형구 감독은 허 감독의 전작 에서

유영길 촬영감독이 차지했던 드넓은 자리를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감독이 콘티도 안 그리고 특별히 주문하는 것도

없어 초반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여러 번 찍다보니 이젠 대충 감을 잡았다. 아주 색다른 맛을 주는 즐거운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을 선보였던 <무사>의 세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리 혼란스럽지는 않다고 한다. <무사>

이전에는 <박하사탕>을, 그 전에는 <아름다운 시절>과 <이재수의 난> 등 동적인 스타일의 작품과 정적인

느낌의 영화를 차례로 했기 때문. 그는 “사실 허 감독이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번 영화에선 컷도 많이 나누고, 카메라도 많이 움직일

것’이라고 밝혀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역시 카메라를 고정시켜 롱테이크만 가더라. 결국 그동안 49회 촬영 동안

스테디캠을 사용한 장면은 하나, 크레인을 사용한 것은 두 장면뿐이었다”며 배신감(?)을 표현한다.

주인공 상우가 소리를 담는 녹음기사라는 점 때문에 이병하 기사가 느끼는 부담감 또한 만만치 않다. “요즘 영화를 보면 왜 그리 소리가 큰지

모르겠다. 작은 소리만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허진호 감독의 생각도 그렇거니와 상우와 은수가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되는 소리채집장면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므로 촬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별개의 팀을 구성해 지방에 파견해놓은 상황. 이들은 보리밭이 물결치는 소리, 대나무숲에

바람이 이는 소리, 풍경이 은은한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파도가 잔잔하게 들고나는 소리, 물레방아 도는 소리

등을 찾기 위해 안면도, 삼척, 보길도 등지를 누비고 있다. 이병하 기사는 “어찌 보면 간단한 소리인데도, 녹음해놓은 것을 들어보면 마음에

좀처럼 들지 않는다. 자연스러우면서 미적으로도 가치있는 소리를 찾는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녹음팀은

영화 장면에 맞는 바람이 불 때까지 보리밭에 며칠씩 죽치고 있기도 하고, 알맞은 파도가 밀려올 때까지 해변에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촬영현장에서도

유지태와 이영애가 연기할 때 조용조용 말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들의 음성에 비해 외부 음향이 너무 크게 녹음될까봐 노심초사중이란다.

“멜로라는 장르영화를 만들면서 그 장르의 규칙을 미묘하게 뒤튼다”는 허진호 감독에 대한 평가처럼, <봄날은 간다>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유행가의 통속성을 살포시 변주해 사랑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극중에서 상우가 찾고 기록하는 소리가 결국

청명한 마음의 울림이듯 말이다. <봄날은 간다>는 7월 초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거쳐 9월 하순쯤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글 문석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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