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스파이더 맨2>에 나타난 미국식 영웅을 비판하다
“영웅 없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은 묘하다. 도구적이나마 합리성을 공유한 소시민적 세계가 피와 신음을 거름으로 영웅을 키워내던 난세보다는 낫다? 맞다. 영웅하나를 키우기 위해 무수한 사람이 살육되던 ‘킹 아더’의 세계보다는 아무런 희생 없이 스타라는 애완적 영웅을 발명해 갖고 노는 현대는 분명 복되다. 그런데 왜 브레히트는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보다 영웅 없는 시대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불행의 비교우위를 말했을까? ‘영웅 없는 시대의 불행’은 뭐란 말인가.
브레히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아도르노는 인류의 역사를 지배의 역사로 봤다. 인간의 행위를 가장 기저에서 규정하는 힘이 지배욕이라는 비관적 감정은 영웅을 갈망할 법도 하다. 하지만, 아도르노도 브레히트도 영웅을 염두에 두진 않았다. 왜냐하면, ‘영웅 없는 시대’의 불행은 영웅이 나타나 한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의 지배가 물리적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영웅 없는 시대’의 지배는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영웅시대의 지배의 수단이었던 칼이 주인의 의지에 복종했던 것과 달리 도구적 합리성은 종종 주인의 의지를 배신한다는 것이다. ‘스파이더 맨’에서 문어 박사의 몸에 덧붙여진 기계 팔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기계 팔은 주인인 문어박사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제어 칩이 없으면 언제 주인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으로 둔갑할지 모른다. 인류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선물해주기 위한 생산의 도구지만 제어 칩의 파괴로 주인을 지배하게 된 기계 팔. 샘 레이미 감독이 상상한 세계는 오래전에 아도르노가 통찰한 도구적 합리성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도덕성’이란 삶의 가치를 ‘합리성’이란 생산의 가치가 지배하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이다. ‘문어 박사’는 그런 사회의 상징이고 그와 싸우는 ‘스파이더 맨’은 주적을 제대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인 영웅이다. 하지만 방법론이 틀렸다.
‘스파이더 맨’은 문어박사의 노출된 도구적 합리성을 스파이더맨의 은밀한 도구적 합리성으로 물리친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은 문어박사보다 더 위험하다. 이유는 이렇다. 이 영웅담의 핵심은 ‘문어박사’라는 선명한 악의 존재를 끊임없이 희생적 동기가 부각된 전능한 능력의 스파이더맨이 응징한다는 거다. 이 선악구도에서 관객의 감정이입은 완전히 스파이더 맨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착하면서 전능하니까! 그런데, 여기서, 착하다는 욕망의 입구를 여는 열쇠일 뿐이며 궁극적인 탄착점은 전능함이다. 악을 응징하는 전능한 폭력. 이건 문어 박사가 꿈꾸었던 무한 에너지에 대한 욕망을 도덕적 제스처로 유보시켰다가 폭발시키는 구조다. 말하자면 문어박사의 은밀한 복제에 불과하다. 도구적 합리성은 언제나 확신을 전제로 전능한 힘을 향해 질주한다. 이 궤도의 막장은 도덕적 확신위에 전능한 힘을 종교적 태도로 갈망하는 파시즘이었다. 아우슈비츠는 그 사실을 누누이 설파해 왔다.
그럼에도 스파이더맨, 슈퍼맨, 원더우먼 등등의 미국식 영웅들에 감정이입이 쉬이 되는 것은 왜일까? 혹시 비용이 안 드는 정의에 대한 싹수없는 갈망, 정의를 상상하는 순간조차도 승자의 자리에 집착하는 맹목적 의지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도덕적 영웅에 대한 갈망은 축적된 자산에 대한 상실의 공포가 불러오는 일종의 방어적 광기가 아닐까? 가장 축적된 자산이 많은 미국에서 이렇게 영웅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다니 말이다. 가장 분주하게 도덕적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 자는 이제 약탈에서 손을 털고 축적된 자산을 지키고자 하는 자이다.
도구적 합리성에 대항하는 진정한 현대적 영웅은 무력하지만 용기 있는 모습으로 잠시 영웅적 장면을 연출한다. 정신을 차린 문어박사가 마지막에 기계를 안고 강물로 사라지는 그때 그는 잠시 영웅이지만 우리는 보지 못한다. 현대에서 영웅을 불러오는 것은 정의에 대한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헌신에 대한 해석학적 시선이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