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두나를 만나기 위해서 대학로로 갔다. 배두나는 지금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 중인 연극 <선데이 서울>에 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두나가 제작비까지 투자한 <선데이 서울>은 박찬욱과 이무영 감독이 함께 쓴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청춘예찬> <쥐>의 박근형이 연출가가을 맡은 작품. 경쟁에서 밀려나기만 하는 냄비 세일즈맨 병호와 아내의 수술비를 마련할 수가 없는 그 동생 택시기사 정학, 정학을 사랑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파는 옌볜 처녀 정자가 막다른 골목에서 손잡고 출구를 찾는 이야기다. 벌써 보름 넘게 날마다 무대에 섰던 배두나는 인터뷰를 하던 날도 조금 일찍 극장에 도착해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면서 서둘렀다. 잠깐 슈퍼에라도 들르는 것처럼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신경 써서 손질하지 않아 뻗친 머리카락 그대로 나타난 배두나는 더위 탓인지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곧 묻지 않아도 혼자 열심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연극에 출연한 배두나는 무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젊은 연극배우였다.
무대인사를 하면서 혼자 쑥스러운 것처럼 웃고 있더라. 7월15일부터 공연을 했는데 아직도 떨리는가.내가 너무 쑥스러워하니까 무대를 계속 보고 있는 조명 스탭들이 자신감을 좀 가지라고 한다. (웃음) 처음이나 지금이나 떨리는 마음은 똑같다. 처음 무대에 설 때는 연습을 너무 적게 하지 않았나 싶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박근형 연출가는 연습 양보다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라서, 리딩은 별로 하지 않고, 캐릭터나 극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곤 했다. 정자는 원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두 남자를 구원해서 하늘로 데려가는 천사 같은 여자 정도? 그런데 박근형 연출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정자가 왜 두 남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왜 옌볜에서 한국까지 왔고, 부모하고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살을 붙일 수 있었다.
많은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는 느낌은 어떤가. 스탭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과는 다를 텐데.너무 다르고 아직도 떨린다. 영화는 편집이나 음향효과 같은 후반 작업이 있으니까 매만지는 게 가능하다. 감독만 믿으면 마음 편하다. 그런데 연극은 NG가 없어서…. (웃음) 가끔 실수도 하는데 얼마나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더라. 그리고 내가 차라리 신인배우였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배두나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 이런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고, 도마 위에 올라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큰 실수를 한 적도 있나.큰 실수까지는 아니고, 배우들끼리만 아는 실수를 했다. 내가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컵라면에 물을 부어서 가지고 나갔는데, 상대 배우가 라면을 안 먹는 거다. 다음 대목은 그 라면을 내가 낚아채서 먹는 거라 확 들었는데, 스프를 안 넣어서 스프 봉지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자꾸 웃음이 나와서 대사 하기도 힘들었다. 그 다음부턴 배우들이 “두나야, 스프는 뜯었니?” 물어보고 그런다. (웃음) 처음 몇번은 암전됐다가 다시 무대로 나갈 때 함께 나가는 배우들이 손잡아서 데려다주고 그랬다. 내가 무대에서 계속 물을 뿌리니까 내 자리만 암전 테이프(어두운 무대에서 배우의 위치를 표시하는 테이프)가 자꾸 떨어져서. 연극은, 어려운 점도 많지만 배우가 자기 소품을 직접 챙겨야 해서 재미있기도 하다. 나도 극장에 오면 먼저 내가 쓰는 소주잔 같은 거 세제로 씻는다. 내가 스탭이 된다는 게 너무 재미있다. 재미있다고 그러면 연극을 오래 하신 분들은 놀고 있네, 그러실지도 모르지만 이거 끝나고 나면 나라는 사람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
박근형 연출가와는 지난해에도 작업을 같이 하려고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선데이 서울>은 원래 영화화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였는데, 어떻게 이 작품을 하게 되었나.박근형 연출가는 너무 좋아하던 분이다. <청춘예찬>을 보고 진짜 많이 울었다. 지난해에 <삼총사>를 함께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못했다. 시간이 남아야 연극을 한다는 뜻은 아니고, 내 스케줄 때문에 다른 배우들한테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올해는 꼭 하려고 했던 참에 우연히 박찬욱 감독과 셋이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박근형과 박찬욱의 만남으로 한번 해보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거다. 시나리오는 신선하긴 했는데 확 끌리지는 않아서, 솔직히 말하면 출연 여부는 반반이었다. 그런데 연극에 출연한 건 연출가가 박근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독이나 연출가를 얼마나 믿고 따르는지, 꽉 잡고 놓지를 않는다. (웃음) 연극은 원작과는 많이 달라졌다. 원래는 정학과 병호가 형제도 아니었고, 정자가 정학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를 연극으로 옮기다보니 어두우면서도 유머러스한 부분이 잘 살지 못한 건 좀 아쉽다. 병호가 미란이, 그 냄비 사준 여자를 죽이는 장면은 진짜 웃음이 나오는, 아이러니한 유머가 있는 거였는데.
출연도 하고,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기도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연극을 한번도 본 적 없는 십대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소극장 연극은 지방 공연을 뛰더라도 제작비 절반도 건지지 못하기가 쉽다. 엄마(연극배우 김화영)가 출연한 <로베르토 쥬코> 제작했을 때도 그랬으니까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지방 공연을 가야 하나, 그런 생각도 가끔 한다. (웃음) 솔직히 다음 영화 출연할 때까지 공백이 있는데 쉬고만 있으면 감각이 떨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기 싫은 드라마나 영화에 억지로 출연하기보단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다른 일을 했으면 돈을 좀더 벌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돈보다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믿는다.
전에 ‘배두나답다는 게 뭔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선데이 서울>에 출연하면서 그런 면에 도움을 받았나.나도 언제까지나 <플란다스의 개>나 <고양이를 부탁해>만 찍고 있을 건 아니니까. (웃음) 내 연기는 생략이 많았다.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생략하고 참으면서 관객이 상상하도록 했다. 그런데 연극을 하면서 내가 화끈하게 표현해야 관객도 속이 시원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팽창하는 연기를 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온 연기를 개선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테크닉을 익히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발성 연습은 오래 하진 않았다. 내가 말투가 어눌해서 그렇지(웃음) 목소리는 꽤 카랑카랑한 편이다. 제일 뒷자리에 앉은 사람까지 잘 들리게 대사를 하자, 이렇게 마음먹으니까 잘됐다. 박근형 연출가도 “두나야 그냥 크고 또박또박하게만 말해” 그랬고.
연극은 같은 연기를 수십번 되풀이한다. 적응하기 어렵지는 않았는가.그것 때문에 연극이 힘들다고 느끼게 됐다. 배우도 사람인데 매번 똑같은 감정을 만들어내는 건 진짜, 기술이라고 본다. 40번 넘게 공연하다보면 감정에 면역이 되기도 하고, 처음엔 충격이었던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공연할 때마다 삼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대본을 읽는데도, 한번은 이 대사에서 울컥했다가 다음엔 저 대사에서 울컥했다가 그런다. 되게 신기한 건 무대 뒤에서 다른 배우 연기를 지켜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하고 얼마나 감정을 터뜨리는가에 따라 모든 배우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영화는 다른 배우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선데이 서울> 끝나고 나면 다시 영화에 출연하는 건가.한국에선 봉준호 감독의 다음 영화에 출연할 것 같고, 야마시타 노부히로라는 일본 감독 영화에도 출연할 거다. <후나키를 기다리며>라는 영화를 봤는데, 진짜 희한하고 독특하고 웃기고 기발하다. 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나서, 영화제에서 만난 봉준호 감독에게 날 만나고 싶다며 많이 졸랐다고 한다.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 홍보 때문에 일본에 갔더니 감독이 직접 비디오를 들고 날 만나러 온 거였다. 너무너무 재미있는 영화였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들은 흥행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마음에 부담이 되지는 않나.그런 질문은 이제 그만 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영화배우로 시작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스물다섯인데, 최소한 서른다섯까지는 연기를… 할 수 있겠지? (웃음) 지금까지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과정이었던 거다. 나는 아직 여배우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아역배우도 아니고…. (웃음) 그리고 내 영화들은 다 좋았다. 언젠가 내가 옳았다는 게 밝혀지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