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아는 여자>와 김선일씨 때문에 고통의 판타지를 소통하다
만원 지하철에서 앞사람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인기척도 없이 떼어내줄 것 같은 여자. 넘어져 우는 꼬마를 안아일으켜 옷을 털어주고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려줄 것 같은 여자. 친구와 떡볶이를 먹는 중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난다 해도,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쿡 집어 길잃은 외계인의 손에 쥐어줄 것 같은 여자. 배우 이나영은 ‘외계인처럼 낯선 마스크’에서 ‘외계인과도 서슴없이 몸짓언어를 나눌 것만 같은 그녀’로 거듭나고 있다. 그녀의 동작에는 매순간 안타까운 머뭇거림이 깃든다. 그 어눌한 서성거림이야말로 확신에 찬 어떤 올바른 언어들보다 아릿한 울림을 주는, 그녀만의 소통 방식이다. 겁먹은 듯 서늘한 그녀의 눈빛은, 한번도 살을 맞댄 적 없는 것들과의 소통을 향한 우리의 목마름을 뭉클하게 건드린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 한이연(이나영)은 소통의 대상이 자신의 몸짓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소통불능의 상황을 처절한 소통의 몸짓으로 채워나간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수신자에게 가닿지 못하는 애절한 편지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술에 절어 필름 끊긴 남자를 “봉투에 담아” 여관에 데려온 그녀는 잠든 남자 곁에 누워 그렁한 눈으로 속삭인다. 그냥 곁에 있고 싶다고. “그냥. 아저씨 살아 있을 때까지만.”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술꼬장을 부리는 그 남자에게, 그녀는 모기 날갯짓보다 작은 목소리로 귀엣말을 전한다. 10년의 ‘순한’ 스토킹 끝에. “사랑해요.” 어떤 아름다운 미장센을 동원해도 그저 상투적일 뿐인 그 한마디가, 그녀의 어눌한 속살거림으로 새로운 말의 무늬를 입는다. 10년에 걸친, 수신자 없는 송신. 수신자의 시선에 달뜨지도 수신자의 무심함에 굴하지도 않는 그녀의 무구한 집중이, 마침내 그녀의 목마른 언어를 그에게, 그리고 사랑에 얽힌 관객 저마다의 상처들에, 조용히 가닿게 한다.
한편 동치성(정재영)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일상의 화법을 깡그리 상실한다. 세상을 등질 날을 이미 예약해버린 그에게는 모든 위험과 고통이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사소하다. 그러나 일상적 소통의 코드가 사라진 자리 위에, 비로소 엉뚱한 우연을 품은 소통의 코드가 번져나간다. 그는 한밤중에 쳐들어온 도둑과 인생 카운슬링을 하는가 하면 도둑의 신산스런 넋두리에 공명한 나머지 덜컥 200만원을 선물해버린다. 은행털이들이 총기로 위협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그는 침을 튀기며 그들에게 사랑학 강의를 늘어놓는다. 그의 소통의 코드는 ‘정보의 필요’나 ‘감정의 전달’이 아니다. 죽음의 시한폭탄의 초침이 재깍거리는 소리를 매순간 듣는 그는,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사랑과 죽음에 관한 짧은 필름’으로 연출한다. 소통의 문법이 이토록 그로테스크한 두 젊음 덕분에, 관객은 일상에서는 쉽게 대면할 수 없는 삶의 무늬들(좀도둑·은행털이·애인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여인)과 환하게 접신한다.
<아는 여자>는 ‘죽음’이라는, 아무리 생살을 부대껴도 결코 친밀해질 수 없는 매개를 통해 불가능한 소통의 마당을 일구어낸다. 2004년 여름, 한 ‘죽음’이 할퀴고 간 폐허 앞에서 우리는 얼굴을 모르는 수만겹의 핏빛 상처들과 만난다. 선일씨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에 대한 미안함과 그의 목에 겨누어진 칼이 나의 목에도 생생하게 겨누어지는 너무도 구체적인 고통의 판타지를, 소통했다. 평범한 나와 그대가 결코 ‘손댈 수 없는 힘’들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무엇들을 버젓이 유린하고 있다는 분노도, 분명 우리의 일상 곳곳에 틈입해 있지만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의 ‘목숨’마저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배팅’하고 있다는 공포도, 그의 죽음이 소통하게 한 소중한 메시지였다. 현대의학은 말한다. 고통의 감각은 결코 한 생명체에서 또 다른 생명체로 건너갈 수 없다고. 그러나 누군가는 이 ‘건너갈 수 없는’ 한 생명의 공포와 고통을 삶이 허락하는 날까지 되새김질할 것이다. 한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한 젊음과의 불가능한 소통의 몸짓이, 광화문 거리를 휘돌아쳐 또다시, 수신자 없는 송신을 시작하고 있다. 정여울/ 미디어 헌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