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우동 속에는 홍합조개와 오징어가 같이 들어 있다. 이런 조합은 해물스파게티나 매운탕 같은 음식에도 늘 있는 것이니 특별할 것은 없다. 이들은 같은 바닷물 속에서 태어났고 지금 이 우동국물 속에서 우연히도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들 부류가 살아온 방식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집을 갖고 한곳에 붙박이로 눌러앉아 살았던 반면, 다른 하나는 집없는 물고기들처럼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떠돌이로 살아왔다.
조개가 자신의 몸을 돌처럼 단단한 껍질로 감싸는 데 열중하는 동안, 오징어는 자신의 몸을 유선형의 부드러운 주머니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한쪽은 위험을 막아낼 성벽을 쌓는 일에 몰두하고, 다른 하나는 위험으로부터 재빨리 달아나는 방법을 선택한다. 한쪽은 공간에, 다른 한쪽은 속도에 목숨을 건다. 둘 다 살아가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이다. 유전자의 절대명령인 생존의 욕구, 약탈자의 먹이가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들을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디자인의 문제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축적된 기억에 의해 형성된 어떤 의도를 자신의 몸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현하는 디자이너이고 건축가인 것이다.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주민이 될 것인가 방랑자가 될 것인가, 집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동차를 살 것인가. 어떤 디자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형식과 조건이 달라진다.
조개의 삶에서 집은 절대적이다. 집을 잃은 조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식탁 위에 올라온 조개의 속살이 힘없이 껍질에서 떨어져나올 때까지도 그것과 껍질을 연결하고 있던 끈질긴 근육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내 집 한칸을 마련하려는 사람들의 집착도 이와 비슷하다. 집을 가진 조개는 껍질의 무게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보다 안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흡수하는 영양분 중 많은 부분을 집에 투자해야 한다. 집을 비우고 외출을 하거나 자유롭게 여행하는 삶은 꿈도 꿀 수 없다. 조개는 자기 집에 갇힌 종신수로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삶을 감수한다. 바닷가의 조개껍질이 기념품이 되는 것은 그것이 우주 속에 한때 존재했던 고독한 영혼의 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개는 생물이면서 무생물인 돌을 닮고자 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바다 속 돌멩이들의 색상과 모양을 흉내내면서 자신이 죽은 돌이라고 주장한다. 잠깐 죽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포장한다. 죽음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역설이 조개의 전략이다.
오징어는 물고기가 아니면서 물고기를 닮고자 한다. 지느러미도 없고 외부의 공격을 막아낼 단단한 비늘도 가시도 없는 연약한 몸을 가진 채로 물고기의 동적인 삶을 모방한다. 약탈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오징어는 자신의 몸을 물결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벌거벗은 살덩이 그대로 방치한다. 자신과 외부를 구분하는 표피는 종잇장처럼 얇은 막 하나로 충분하다. 조개가 외부와의 접촉면에 에너지를 집중시키는데 반해 오징어는 자신의 몸 내부에 유연하게 수축시킬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조개처럼 고정된 집을 갖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온 바다가 제 집이 된다.
둘은 그 디자인의 허점을 빤히 알고 있는 어부들의 손에 붙들려 지금 이곳까지 끌려왔다. 우리 각자의 디자인도 언젠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집에 집착하는 우리의 삶은 조개의 삶과 많이 닮았다. 때로 인간에게는 이러한 삶만이 가능한 것인가, 집을 버리고 자신의 내부를 비우고 벌거벗은 몸으로 물결에 따라 흔들리며 외출하는 삶을 디자인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글·그림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