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에 동숭아트센터가 있다면, 강남에는 LG아트센터가 있다. 두곳 다 정부가 아닌, 기업 혹은 개인이 운영하는 문화재단을 축으로 하여 시장의 실험을 견디고 살아남았으며 올해 들어 다양한 문화적 실험과 시도들로 확장 하는 중이다. 동숭아트센터는 올해 ‘연극열전’이라는 연간 단위의 획기적인 프로젝트로, LG아트센터는 무용, 연극, 음악계를 국내외의 전위적인 그룹들과 풀어보는 참신한 기획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ll 동숭아트센터
1989년에 개관,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불리던 대학로에 ‘민간 종합 공연장 시대’를 연 동숭아트센터는, 밖으로는 대극장과 소극장, 하이퍼텍 나다, 동숭씨네마텍 등을 통해 연극과 영화를 아우르는 기획을 선보이고 있으며, 안으로는 옥랑문화재단을 통해 국내 문화예술 활동 및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예술이 돈을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에서 돈을 버는 수단도 된다”는 김옥랑 대표의 신념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장진 l 문화창작집단 수다 대표 겸 영화감독 - “시장성과 대중의 기호를 파악하지 않으면 좁은 그릇 안에서 복닥거리는 것밖에 안 된다.
동숭아트센터의 활동 가운데서 ‘2004년 한국 연극 최고의 프로젝트’를 내세운 ‘연극열전’ 시리즈는 단연 돋보이는 기획으로 세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지난 24년간 국내에서 화제작으로 손꼽힌 연극 15편을 1월부터 12월까지 공연한다는, 이 비상한 기획은 동숭아트센터 프로그래머인 홍기유의 머리에서 시작됐다. 거기에 문화창작집단 수다의 대표이자 영화감독인 장진의 머리가 포개지면서 ‘연극열전’이라는 프로젝트가 탄생되었다. 총 15개의 작품에 10개 극단이 참여하고 수십명의 프로듀서와 마케팅 인력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에 드는 비용은 40억원 상당. 어지간한 영화 한 편의 제작비에 ‘불과’하지만 연극계로서는 초대형 프로젝트다.‘판짜기의 달인’ 장진과 ‘서비스 정신만이 연극계의 희망이다’를 외치는 홍기유가 만나면서 불꽃이 불길이 돼버린 것이 바로 연극‘열’전이다. "이미 지나가버려 전설처럼 이름만 남은 연극들을 영화처럼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연극으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시한부’적 삶을 지닌 연극을 생생한 것으로 만들었고, 대학로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영화계로 걸어가 돌아오지 않는 배우들"로 인해 죽어가는 연극계에 대중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을 대거 ‘돌아오도록’ 해 배우들로 하여금 "관객과 호흡하고 싶다"는 열망을 되찾게 한 점도 이 프로젝트의 주목할 만한 점 중의 하나. 그외에도 ‘연.애.인(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캠페인, ‘열전자봉’(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 시스템)을 통해 관객을 연극 스스로가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상업시장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 순수예술의 정신만을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시장성을 고려하고 대중의 기호를 파악하지 않으면 좁은 그릇 안에서 복닥거리는 것밖에 안 되는 거다. 예술, 그거 혼자서만 한다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연극도 생계수단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장진의 말이다.
홍기유 l 동숭아트센터 프로그래머 - “연극열전은 시대정신의 릴레이가 아니다. 중심은 레퍼토리의 정확한 재현에 있다.”
15개 작품 릴레이 상연, 유명 배우 대거 유입
현재 중반에 들어선 동숭아트센터의 ‘연극열전’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상업적인 기획에 불과해보이던 레퍼토리 시스템을 한 단계 끌어올려 문화의 흐름을 인식하게 했고, 그때그때 임시로 기획되던 연극계에 장기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일각에서는 ‘낡았다’, ‘시대착오적이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프로그래머 홍기유는 이에 대해 "연극열전은 시대정신의 릴레이가 아니다. 시대정신은 계속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열전의 기획의도이자 중심은 레퍼토리의 정확한 재현에 있다”고 답했다. 연극이 시대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기록하는 장르로 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좋은 연극은 결코 관객에게 외면당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홍기유는 내년에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하는 ‘캐주얼한’ 국제 공연 예술제를 기획 중이다.
ll LG아트센터
2000년 3월에 문을 연 LG아트센터는 LG연암문화재단이 문화예술의 창작과 교류를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문화 인프라 구축’을 내걸고 건립한 다목적 공연장이다. 짧은 연혁에도 불구하고 강남에 문화예술 공연장으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LG아트센터는 그동안 독일 피나 바우쉬의 부퍼탈 탄츠테아터,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 유럽 연극의 새로운 강자 독일 함부르크의 탈리아극장, 20세기 ‘디지털 미디어 연극’의 개척자인 로베르 르파쥐,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필립 글래스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초청하여 국내에 선보였으며, 대중적인 감각의 슬라바 폴루닌의 ‘스노쇼’, 팻 메스니 그룹,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등을 소개해 ‘예술과 시장논리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국내 예술단체와의 공동 기획을 통해 우수한 레퍼토리 개발에 힘써왔으며 국내 공연작품에 대한 관객의 호감도를 꾸준히 높여왔다.
2004년 기획은 선명한 프로그래밍과 장르의 특화된 구분 쪽으로 한발 더 나아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연극 분야에서는 해외 대형 뮤지컬(<미녀와 야수>)의 국내 공연 유치를 기본 플랜으로 실험적인 경향을 지닌 젊은 연극인들의 작품(젊은 연극인 시리즈)을 올렸으며, 무용 분야에서는 전위적인 유럽 무용계의 흐름(세드라베, 사샤 발츠, 랄랄라 휴먼 스텝스)을 주목하면서 국내 젊은 안무가들의 참신한 공연(4인의 안무가 시리즈)을 선보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창의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클래식 연주자들(비온디&갈란테, 스티븐 이셜리스,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과 재즈·월드 뮤직의 공연(제인 버킨, 게리 버튼,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 그리고 영화음악계의 거장들이 무대에서 펼치는 독특한 프로그램들(탄둔, 마이클 니만 밴드)이 눈에 뜨인다.
선명한 프로그래밍과 장르의 특화
정재왈 l LG아트센터 운영부장 겸 공연평론가 - “검증된 작업과 실험들을 적절하게 배치한다면 관객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공연평론가이기도 한 LG아트센터의 정재왈 운영부장은 “공간적인 특성 살리기, 즉 대극장보다는 작은 사이즈의 LG아트센터 극장이 실험의 공간에 걸맞다는 것이 2004년 프로그램 구성의 핵심”이라고 소개했다. LG아트센터의 기반인 강남 중산층 관객의 취향을 그는‘아방가르드하면서도 동시대적’이라고 정의했다. 이때문에 그동안 ‘명품 공연만 수입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던 LG아트센터가 최근에는 다분히 선동적인 수준의 실험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사실 관객의 취향이 진보하는 것은 유명 공연보다는 개성 강한 동시대의 작품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몸집 크고 취향 ‘우아’하기로 정평난 LG아트센터가 실험이나 전위(Avant-garde)의 짐과 냉대를 과연 얼마나 견디며 지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에 대한 LG측의 해법은 ‘절충’이다. “국내 관객의 취향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가야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까지는 국내 관객의 ‘취향’이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본다. 쏠림(유행)이 취향처럼 발산될 뿐이고 그만큼 주관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유행에 편승하지 못하면 묻혀버리고 마는 단점이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오히려 취향의 부재란 새로운 것을 그만큼 발빠르게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검증된 작업과 실험들을 적절하게 배치한다면 관객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본다.” 연극인의 입장에서는 ’아, 너무도 달콤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LG측이 지고 있는 현실적인 짐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20억원이 넘는 임대료에 대한 부담과 재단의 자산으로 돌리는 재테크도 요즘에는 원활하지 않다고.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강력한 해답 중의 하나는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대기업들이 세금감면을 위한 차선책으로 주로 이용하는 문화 관련 사업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거듭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강구되어야 할 때다. ‘문화 인프라’의 확장은 개인이나 재단이 아닌 국가 전체가 이끌어나가는 것이라는 상식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기업의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일궈나가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문화행정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동숭아트센터나 LG아트센터와 같이 적잖은 경험을 축적하고 열정도 보존하고 있는 현장에서 발굴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정안나/ 연극인 [email protected]·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