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의 아일린 워노스- (영화 속에서는) 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타입에도 묶을 수 없는, 비전형적인 인물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제까지 알려진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티나 브랜든/브랜든 티나의 순진한 가면놀이의 정서라든가 <차퍼>의 마크 ‘차퍼’ 리드의 놀랍도록 뻔뻔한 광기의 매혹 같은 것은 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거구의 리, 그녀의 영혼은 놀랍도록 미성숙하다. 리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자 특유의 순진함을 허세와 과장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심지어 ‘레즈비언도 아닌 거리의 창녀’다. 몸을 팔아 ‘쉽사리’ 돈을 버는, 자본주의에 의하면 노동에 비해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는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악덕인 그런 위치의 여자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러니까 미성숙한 영혼이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순간 폭발하는 이상한 정화의 순간들이 바로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그녀는 셀비를 만난 뒤부터 지금까지 표현하지 못했고 억압받아왔던 모든 감정들을 노출시킨다. ‘당신처럼 곱게 자란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라며 하나의 변명거리를 찾은 듯 끊임없이 ‘상황’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우리는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너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르트르식의 엄격한 실존주의의 잣대를 차마 들이대기 망설여진다. 값싼 동정심?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녀 자신은 몰랐겠지만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그녀의 심연을 들여다보고야 만 ‘곱게 자란’ 우리의 죄책감 서린 망설임이라고 해야 할까.
미성숙한 영혼이 폭발하는 정화의 순간, <몬스터>
글 김용언
2004-06-15
‘아름답지 않음’을 어떻게 가차없이, 진심을 다해 형상화할 수 있을까?
1989년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이후 총여섯명의 고속도로 운전자들을 살해한 끝에 2002년 10월9일 플로리다 형무소의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아일린 워노스를 표현하는 언론들의 선정적인 헤드라인은 항상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이었으며, 그녀를 표현하는 공적인 이미지는 ‘괴물’ 같은 거구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8살 때 처음 아버지 친구에게 강간당했고, 13살 때 이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창녀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어떤 종류의 관심이나 애정에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채 돈으로 육체를 거래하는 과정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를 표현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단순명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를 다룬 영화 <몬스터>를 보면서 우리는 또 한번 함정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실존 인물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한 일인가?
1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