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이전
프랑스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잠깐 한국에 들어왔을 때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쪽기사 하나를 봤다.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 기사였다. 내 얘기가 나름대로는 기구해서 시나리오를 하나 썼다. 스스로를 완성해서 승리하는 드라마로,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한 무명화가가 프랑스에 가서 르 살롱에 당선되는 이야기다. 여지없이 떨어졌다. 그 아듬엔 <흙바람의 아들>이라고 아버지 이야기를 썼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두려우하고 살았지만 아버지를 측은하게 생각했고, 아버지한테 인정받는 아들 이야기. 이것 역시 주인공이 국내화가로 성공해서 아버지가 아들의 전시회에 오는 이야기. 또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이것저것 쓰다가 어느날부터 '구상'시나리오 대신 '반추상'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노출>이라는 시나리오가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 본선에 올랐다. 그게 계기가 됐다. 그때 작가교육원에서 시나리오 공부를 조금 했다. 거기서 프랑스에서 그림 그리는 한국인 이야기인 <화가와 사형수>라는 시나리오를 써서 상금 100만원을 탔다. 뒤이어 영진공에서 <이중노출>이 대상을 받았다. 상금이 1500만원이었다.
1996, <악어>
그 다음해인 1996년에 쓴게 <악어>다. 원래 제목은 '무승부'. 하명중영화사에서 영화를 준비하다가 잘 안되서 영화사를 옮겼다. 그전엔 사실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시나리오나 잘 써서 팔고, 시나리오가 영화화돼서 크레디에 '각본 김기덕'이라고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악어>란 시나리오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그냥 넘기기 싫어졌다. 감독 시켜달라고 떼를 썼다. 그럼 시나리오 주겠다고. 논란 끝에 하라고 하더라. 물론 믿고 시킨 건 아닌 것 같고, '저 사람이 그러다 말겠지' 이런 생각으로 시킨 것 같더라. 처음엔 촬영감독한테 지적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찍으면 장면 연결이 안된다고. 그건 한장의 그림을 이어붙이는 것일 뿐이라고. 4개월 동안 정말 힘들게 찍었다. 제작비 대는 사람들과의 마찰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가 엎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세번쯤 중단되기도 했다. 촬영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악어>를 찍으면서 모든 것을 내가 일일이 통제했다. 나만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소품 하나까지 모두 챙겼는데 어느날 소품을 사러 아침 일찍 화방에 들렀다. 그런데 화방이 문을 늦게 열어 촬영현장에 늦었다. 제작자가 화를 냈다.그런 식으로 하면 다 엎어버리고 나한테 돈 다 물리겠다고 엄포를 놓더라. 화가 났다. 소품들 다 던져 깨버렸다. 바로 폭언과 폭력이 돌아왔다. 그날 김밥을 먹는데 김밥이 눈물에 잠길 정도로 울었다. 그걸 본 촬영감독이 제작자를 불러다 사과를 시키더라. 사과받고 10분뒤 웃으면서 영화를 찍었다. 차비가 없어 많이 걸어다녔다. 새벽까지 한강 중지도에서 촬영을 한 뒤 피곤한 몸을 끌고 서울역까지 걸어가곤 했다. 어찌어찌하다 겨우 명보극장 사장님 만나 개봉하고, 그러고나니 마니아들이, 그때의 하이텔, 유니텔, 나우누리 등 PC통신 영화동호회에서 단체 시사회를 요구했다. 시사회하면서 인구에 회자됐고, 그러면서 감독이 되어갔다.1997,<야생동물보호구역>
파리 로케이션이었는데 한달 만에 촬영을 끝마쳤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비행기표가 한달짜리와 석달짜리가 있었는데 한달짜리가 가장 쌌기 때문이었다. 체류비도 만만치 않았다. 모든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부실한 면이 있다. <야생동물보호구역>은 실패작이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건 선입관이 많이 작용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생략과 강조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남북의 문제를 이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형제'라는 관점에서 정리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으니까. 또 반드시 파리라는 장소를 고집한 것이 딴 사람에게는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1998, <파란대문>
<야생동물보호구역> 끝내고 나니 아무도 제작비를 대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영진공 판권담보 제작지원에 <파란대문> 시나리오를 응모했고, '낙점'이 됐다. 3억원을 받아 <파란대문>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기습적이다. 제작자를 못 구하면 바로 시나리오 공모에 응모하는 식으로 해나가니까. 일부에선 나의 다작을 비판하는데 그렇게 왜곡해서 보지 않길 바란다. 임권택 감독이 일전에 "김감독 때문에 내가 영화를 서둘러"라고 하셨고, 다른 감돋들도 쫓기는 기분이 든다고들 하는데 그건 그저 내가 살아온 습관일 뿐이다. 어떤 절박함.2000, <섬>
<파란대문>을 본 명필름이 <섬>을 하자고 했다. 우연히 한 모임에서 심재명 이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고 연결이 됐다. 시나리오 쓰는데 한달이라는 시간을 줬는데 2주만에 써서 갖다줬더니 놀라더라. 작업조건은 좋았다. 하지만 제작비는 4억 3천만원을 넘으면 안된다고 약속했고, 지켰다. 역시 문제는 시간이었다. 11월에 크랭크인했는데, 내가 그려내고 싶은 단풍과 낙엽이 있는 동안 촬영을 끝내야 했고, 스탭들을 끝없이 몰아쳤다. 촬영 마친 다음날 세트를 지었던 저수지에 물이 차올라 세트가 물에 잠겼다. 그 저수지로 스탭들이 나를 던져 넣었다. 스탭 하나가 그전에 자꾸 휴대폰을 달라고 하더라. 눈치를 챘다. 하지만 '그래, 그렇게 해서 스트레스 풀어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싶어 일부러 빠져줬다. 조재현씨가 죽을 뻔한 적도 있다. 물에 잠기는 신을 찍는데, 잠수부가 그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조재현씨에게 10을 세고 물 밖으로 나오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조재현씨는 10을 빨리 셌고, 잠수부는 천천히 셌다. 조재현씨는 호흡을 조절하고 10을 세고 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잠수부가 다리를 안 놔준 것이었다. 거의 익사할 뻔했다. 나와서 1시간 동안이나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 이후로 조재현씨는 절대 물에 안 들어갔다.2000, <실제상황>
<실제상황>은 나-또다른 나-사회 속의 나라는 3개의 '나'라는 시선을 그려보고 싶었다. 대학로 극장에서 10일 이상 리허설을 해서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나중에 생긴 문제는 시간을 초과했다는 점 정도. 장소를 13곳이나 옮겨다녔고 반경이 2km나 됐으니까. 촬영 때 방송카메라가 몰려 촬영을 중단한 것도 한몫했다. <실제상황>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재해석이지 어떤 이벤트나 형식의 실험만은 아니다. <악어>가 내가 영화를 시작한 작품이라서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실제상황>은 '측은하게 좋아하는' 작품이다. 아직은 관객이 알아주지 않지만 그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이 언젠가 발견되길 바란다.2001, <수취인불명>
<수취인불명> 역시 시간싸움이었다. 눈이 오기 전에 끝내야 했으니까. 촬영 끝내고 이틀 뒤에 눈이 왔다. 사실 원래는 강에 미군 수송기가 추락하는 미장센을 생각했는데 그 장면 만들려면 1억원이 든다기에 포기했다. 동원한 미군도 원래는 50명쯤 생각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하고 결국 14명쯤으로, 그것도 러시아 여자를 섞어서 갔다. 그 사람들 일당이 40만원이었다. 미군 등장하는 신이 5개쯤 되는데, 하루 만에 다 찍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아마 훈련보다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제임스 역을 맡은 미군은 2주 계약했다. 돈이 없으면 돈이 만들어질때까지 앉아 기다리느니 숫자를 줄여서라도 빨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정리 위정훈 기자
▶ 김기덕,
한국영화의 낯선 ‘섬’
▶ 상처와
고름의 미학
▶ 네티즌과
김기덕 감독이 나눈 10문10답
▶ 김기덕이
말하는 `영화만들기 1996~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