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한 도시 이야기> 프로젝트의 취지는 이같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연상될 수 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숨쉬는 이 도시는 오로지 나만의 도시다. 10년 전 예술가, 학생, 시민 등 72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비디오와 사진으로 재현했던 10년 전 서울의 모습이 일련의 편집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지금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10년 뒤의 대중과 만나고 있다.
“1994년에 이어 이번에도 축사를 맡게 되어 기쁘다”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소감으로 시작된 <한도시 이야기> 프로젝트의 제작발표회 및 전시회는 2층 전시장에서 펼쳐진 무용가 안은미의 퍼포먼스로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의석, 김지운, 김태용, 이현승, 허진호, 변혁, 김홍준, 이병헌, 김태우, 성현아, 오기민, 김광수, 오정완, 이춘연 등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했으며 채은석, 오형근, 김선정 등 각계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한 기념촬영도 있었다. 일반 관객도 10년 전 1994년 6월9일 720명이 참여했던 행사의 기록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10년 전 기록, 또 하나의 물음
원래 <한 도시 이야기>의 청사진은 1994년, 당시 영화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신인이었던 이재용 감독의 순진한 욕심에서 출발했다. 그는 손오공이 머리털을 이용해서 자신의 분신을 만들 듯이 자신을 대신하는 많은 그의 ‘분신’들이 서울을 스케치해주길 원했다고 한다. 1천만명의 도시 서울에서 1천만개의 서울을 찾고 싶다는 그의 추상적인 생각은 몇몇 문화인들의 만남으로 살이 붙여졌다. 그리고 그들은 1994년 6월9일의 서울을 24시간 동안 담는 프로젝트를 실험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내용 중에는 당시 인터뷰한 사람들의 모습과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일정한 양식의 틀로 또다시 자료화됐고 이러한 분류 역시 또 다른 기록의 형태로 소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다. 수많은 인터뷰 자료 중엔 낯익은 연예인, 정치인의 얼굴도 눈에 들어온다. 당시 16살의 신문배달원의 앳된 모습은 이제 성인이 되었을 그를 기다리게 만든다. 94년 당시 27살의 영화감독 지망생인 이모씨는 지금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관객 중 누군가 그를 아는 사람이 적은 듯한 짧은 글은 십년이란 시차의 전율이 되어 관객에게 전이된다. 난생 처음 본 그의 사진이 결국 영정사진같이 여겨진 사실은 이 전시가 갖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 도시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하루 속에서 세상이 부여한 모든 구분들은 상실된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결국 자신만의 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또 똑같은 조건의 삶을 살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한 도시 이야기>는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10년 전 기록은 이제 기억이 되었으며 현재의 상황을 궁금해하는 또 하나의 물음을 제시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산다’라는 단어 속에 생명과 공간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싫건 좋건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그 속에서 개인의 삶이 형성되며, 이러한 삶이 모여서 역사가 된다. 그 속에 도시가 있다. 도시는 모든 사소한 삶의 흔적들이 형성되는 거대한 무대이며 배경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도시를 관조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리고 이 도시는 소유자가 사라져버린 공동화의 장소가 돼버렸다. 다시 말해, 도시를 소유한다는 것은 물질적 소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강남의 주상복합에 산다고 해서 도시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달동네에 산다고 해서 소유의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도시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진정 그 도시 속에서 숨쉬고 살아 있음을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코기토의 논리를 대입해보면, “나는 도시를 느낀다, 고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누구나 (혹은 아무나) 소유할 수 있다. 단, 자신이 가진 감수성의 촉수를 바짝 긴장시킨 뒤 주변을 바라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쉽지 않다고? 그렇다면 당신도 <한 도시 이야기> 프로젝트에 참가해야 할 것이다. 지금 그곳에선 낯선 당신의 ‘24시간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출발 - 내 위치를 확인하기
<한 도시 이야기 9404>는 2004년의 6월9일의 하루를 다시 담고자 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의 묶음이 될 것이다. 주최쪽은 서울을 택한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가장 거대한 도시이기 때문이며, 또한 본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했을 것이다. 서울을 모델로 시작됐지만, 모든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한 도시 이야기>전이 주목할 만한 문화적 이벤트인 이유는 단지 이 복합문화프로젝트의 아이디어 때문만은 아닐 듯하다. 오히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예술의 향유자가 누구냐는 질문이다. 역사적으로 대중과 도시는 같이 성장했다. 이 도시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아니,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지금 <한 도시 이야기>가 주목하는 것은 예술의 주체는 바로 우리, 대중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또한 대중의 예술참여를 통해 예술이 세상살이와 무관한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조그만 사건들의 기록이란 점이다. 보잘것없을 것 같은 ‘당신의 지금’에 대한 흔적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진솔한 ‘아름다움’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순간 당신이 주변에 던지는 시선이야말로 미술이 탄생한 최초의 사건인 ‘타자에 대한 응시’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고 내가 바라보는 대상을 ‘재현’하는 행위로부터 이미지가 시작되었다.<한 도시 이야기>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은 서울역사박물관에 영구보존될 것이라고 한다. 당신이 포착하는 이미지는 이제 역사가 될 것이다. 내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길을 확인하는 행위만큼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없다. 내가 있는 그곳의 위치를 확인하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행위이며, 이것은 곧 철학의 첫 번째 물음이자 더불어 마지막 물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예술 한번 할까요?
글 정현/ 조형예술가·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