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포커스
MP3로의 대전환 시대, 새로운 상황을 창출하라

MP3 시대의 문턱에서 뮤지션들에게 전하는 충고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서 복제되고 전송되는 ‘음악파일의 시대’는 이미 도달했다. 사람들은 음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파일을 소비하고, 음반업자들은 울상이 되어 불법 다운로드가 음악을 죽이고 있다고 격분한다. 과연 음악파일의 시대가 음악을 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새로운 시대는 음악을 음반업자들의 탐욕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있는가. 이 글은 대변혁을 맞이한 음반시장에서 뮤지션들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금쪽같은 충고다.

Free your mind! Free your music!

편집자

1. 매체의 전환기

음반업 종사자들은 극단적인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에 따라 뮤지션들도 덩달아 우울해한다. 그러나 그 ‘우울’은 어쩌면, 뮤지션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조장하나? 음반업자들이다. 그들은 숨이 막힌다고 말한다. 아무도 CD를 사지 않는다. 사기는커녕 굽는다. 굽는다는 건 소비자들이 직접 CD를 만든다는 말이다. 사야 할 사람들이 CD를 만드니 일삼고 팔려고 CD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CD가 잘 팔릴 리가 없다. 물론 아직도 사람들은 CD를 사긴 산다. 그러나 일종의 ‘장서용’이지 소리를 소비하는 일상의 차원에서의 구매는 아니다.

일상의 소리 소비는 파일형태로 넘어가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음반시장은 불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대목이 있다. 음반시장은 불황이지만 음악 자체의 유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아마도 지금, 음반을 사야 하던 시대보다 음악을 듣는 대중의 음악 듣는 시야는 훨씬 넓어졌을 것이다. 음반시장이 불황인 것은 음악을 만들고 듣는 사람들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음반시장이 음악을 만들고 듣는 사람들의 ‘행위’를 포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행위의 패턴이 음반시장 바깥에서 자리매겨지고 있다. 조금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음반시장의 불황은 다른 무엇이 잘못돼서라기보다 음반시장 자체의 역사적 사명이 숨을 거두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음반 이외의 음악유통 행위에 ‘불법적’이라는 단서를 달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것은 과도기의 현상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매체의 대전환이다. 음악에 관한 한 지금을 ‘MP3 시대의 문턱’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왜 문턱이냐면, 아직 그 소통의 공식적이고도 일반적인 질서나 규율 같은 것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MP3 시대가 되면 확실히 ‘음반’이라는 개념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고 대신 MP3 같은 ‘다운로더블 파일’(downloadable file) 형태의 유통이 음악 저작물의 주요 ‘미디어’로 등극할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대전환의 과정이다.

음반 시장은 불황, 음악의 유통은 활발

200년 전의 음악계를 지배한 매체는 ‘악보’였다. 악보는 공연 이외에 작곡자를 연주자나 청중에게 연결해주는 유일한 매체였다. 악보는 특히 작곡가에게 유리한 매체이다. 연주자는 악보에 기재된 대로 연주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악보대로 연주한 연주자의 음악을 들었다. 작곡가가 콩나물대가리 하나를 한칸 내려 그리면 노래는 그렇게 변했다. 작곡가는 엿장수다.

그래서 주로 작곡가와 악보판매업자들 사이 계약이 이루어졌다. 브람스가 유명한 작곡가가 된 뒤 아버지에게 책을 줄 때 돈을 살짝 넣어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뀐다. 음반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 것이다. 1877년 발명왕 에디슨이 ‘납관’(蠟管)식 구식 축음기인 ‘포노그라프’(Phonograph)를 발명했고 이 기계에 의해 최초로 음악이 녹음된다. 10년 뒤인 1887년 7월14일, EMI의 전신인 미국회사 북미 포노그라프(North American Phonograph)가 설립되었고 그해 9월26일, 설립자인 에밀 베를리너는 기존의 실린더형 축음기와는 전혀 방식이 다른 ‘그라모폰’(Gramophone)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어냈고 1890년에는 오늘날의 레코드 형식인 ‘그라모폰 음반’을 시판하게 되었다. 이러면서 향후 100년간 음악계를 지배하게 될 ‘음반의 시대’가 열린다.

음반의 시대는 단연 연주자나 가수들의 시대이다. 음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소리의 보존 가능성이다. 추상적인 기호들이 그려져 있는 악보와는 달리 음반에는 소리 자체가 녹음되어 있다. 콘서트홀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카루소 같은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집에서도 듣게 된다. 그리하여 예전과는 달리 주로 연주자와 음반판매업자들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진다. 작곡가들은 그만큼 불리해진 셈이다. 악보를 팔면 직접 받을 수 있었던 인세를 연주자나 가수들과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반의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작곡가 역시 덕을 보게 된다. 이른바 ‘대중음악’의 시대인 것이다. 노래 하나 잘 만들어 떼부자가 되는 작곡가가 생기고, 노래 하나 잘 불러 떼돈 버는 가수들이 생긴다. 다 대중의 덕을 봐서 그렇다.

아날로그 음반의 시대는 CD의 발명과 함께 디지털 음반 시대로 넘어간다. 1970년 6월에 영국의 텔덱(Teldec)사와 독일의 텔레풍켄(Telefunken)사가 공동으로 압전식(壓電式) 비디오 디스크를 개발했고, 1972년 8월에는 미국의 RCA사가 정전식(靜電式)을, 같은 해 9월에는 네덜란드 필립스사가 광학식 비디오 디스크를 개발했다. 그것이 지금의 CD가 되었다. CD는 아날로그 전기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여 보존한다. 아무리 틀어도 음반이 닳지 않는다. 생산도, 시스템만 갖추면 훨씬 쉽다. 크기도 작아 보관하기도 좋다.

그러나 디지털 음반의 시대는 다시 디지털 파일의 시대를 필연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CD에 저장된 데이터와 파일형태로 온라인을 떠도는 데이터는 같다. 압축이나 코덱이 다를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저 데이터들인 것이다. 그것들은 초고속으로 복제되고 복제되면서 데이터의 상실률도 거의 없다. 전송을 통해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넘어 유통된다. 누가 누구와 계약하는 시대가 아니다. 주인없는 파일들이 전세계의 온라인을 배회한다. 물론 그것들은 주인이 있어야 하는 파일들이지만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끝에 주인의 얼굴이 지워진다. 거기에 주인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새겨넣는 문제가 아티스트나 업자들에 의해 제기된다.

2. 이 선생의 LP 듣기와 K군의 파일 듣기

이 선생 듣고 싶은 소중한 LP를 선반에서 꺼낸다. 재킷 안에는 속포장지가 있다. 음반이 긁히지 않도록, 속포장지에서 조심스럽게 비닐 음반을 꺼내어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LP 표면을 닦는 부드러운 천이나 솔로 일단 한번 닦는다. 그러고나서 조심스럽게 바늘을 LP 위에 놓고 틱, 틱, 하는 노이즈가 조금씩 이는 것을 들으며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음악이 시작된다. 명반이다. 불후의 명연주다. 이 선생의 방 안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육중한 스피커에서 시원하고 따뜻한 아날로그 신호들이 나와 이 선생의 귀에 가 닿는다. 이 선생은 감동한다. 가끔 재킷을 펼쳐본다. 재킷 역시 예술이다. 대문짝만한 재킷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이 예술이고 안쪽의 디자인도 예술이다. 웅장한 재킷을 쳐다보며 음악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이 선생이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족이다. 20여분 남짓, 음악이 흐르다가 이내 ‘Side A’가 끝이 난다. 이 선생은 B면을 마저 들을 것인지 새로운 음반을 꺼낼 것인지 약간 고민에 빠진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역시 명반이라는 감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주, 녹음, 재킷의 수준, 그 모든 것의 완성도가 이 선생의 마음에 일종의 충만감을 준다. 음반을 다시 재킷에 넣기 전에, 먼지를 한번 더 닦는 것을 잊지 않는다.

K군 하드디스크 안에 몇 기가의 MP3 파일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것들을 빨리빨리 듣지 않으면 자꾸 쓰레기처럼 쌓인다. 쓰레기처럼 쌓이면 어느 노래가 어디에 들어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다운받아놓고 시간이 흐르면 누구의 무슨 노래인지 가물가물해진다. 그렇게 가물가물한 파일들이 수천개. 사실 그중 많은 수의 노래는 듣지도 않고 폴더째 통째로 휴지통에 드래그하여 내다버린다.

거의 모든 노래를 20초 이상 듣지 않는다. 내 하드에 들어 있는 노래들을 모두 다 들으려면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 물론 노래의 처음을 많이 듣지만, 드래그하여 중간 부분도 한번, 끝부분도 한번 듣는다. 뚝, 뚝, 노래는 끊기고 노래의 전체 구조는 내 감각의 자장 밖에 있다. 컴퓨터 스피커는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예전의 스피커와 비교하면 그것들은 스피커도 아니다. 음악을 듣는 환경은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열악해졌다. 그러나 스피커가 좋아서도 안 된다. MP3 파일의 음질 때문이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이름도 없는 수많은 숫자뭉치 덩이. 노래들이 꼭 정충 같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무방향성의 그 수많은 정충들이 하드 안에서 바글거린다. 하드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들은 지금도 끝없이 어디엔가로, 누군가에게로 가고 있다. 당나귀니 뭐니 하는 프로그램을 걸어놓고 있으면 도저히 하루에 다 들을 수 없는 양의 노래들이 뜬다. 물리적으로 그렇다. e-donkey는 오늘밤에도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느라 잠을 자지 못한다. K군은 당나귀에게 일을 시켜놓고 방금 전 잠들었다. 동녘이 어스름, 밝아온다.

‘듣고 보관하기’에서 ‘듣고 버리기’로

파일은 너무 간접적이고 무가치하고 손쉽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MP3 파일은 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 현장을 찾는 일에는 예전보다 더 적극적이다. 생생함. 음반을 사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음반시장은 불황을 호소한다. 그런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저변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MP3 아니면 찾아 듣기 힘든 노래들을 많이 찾아 들었다. 희귀한 노래들도 MP3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판 구하려고 동두천까지 나다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파일 찾으려고 밤새 인터넷을 헤매는 젊은이들은 많다. 그러나 예전만큼 수고스럽지는 않다. 나보다 당나귀가 더 수고한다. K군의 아버지 방에 있는 장서 옆에는 LP의 무덤이 있다. 엄마는 먼지 날린다며 그 무덤을 처분할 것을 원하지만 아버지는 반대다. 그 무덤에 들어가 자기도 죽을 모양이다. K군은 가끔 그 LP들도 듣는다. 복고풍이다. 그러나 새로 나온 음악은 무조건 파일부터 찾는다. 그러나 오래 쌓아놓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하도 다운을 많이 받다보니 가끔 컴퓨터가 완전히 맛이 가서 윈도즈를 새로 깔아야 한다. 그래서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수도 있다. 채우는 것도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비워놔야 한다. 빨리빨리 지워 없애야 한다. 파일 듣기는 텅 비움의 실천이기도 하다.

3. 돈의 방향

음악계는 매체의 대전환을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선도하고 있다. 영화도 내려받아서 보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파일이 너무 크고 시간도 걸려 아직은 파일 형태의 유통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또 무엇보다도 ‘극장에 가는 일’ 자체가 하나의 세리머니이다. 연인들, 가족들, 나들이 겸 극장은 여전히 사람들의 ‘밖에 나가기’의 중요한 코스다. 그러나 음악은 매체의 전환을 끌고 나가기에 딱 적당하다. 파일 크기도 적당하고 무엇보다도 포터블이다. i-POD나 기타 MP3 플레이어로 들고 다니며 들을 수 있다.

아직은 이 바닥에 룰이 없다. 기존의 저작권법은 새로운 단계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파일은 ‘물건’이 아니다. 파일 이름이 있는 숫자의 덩어리일 뿐이다. 기존의 ‘카피라이트’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주체와 그 권리가 새겨진 ‘객체’를 모두 상정하고 있다. 파일의 시대에는 그 ‘객체’의 실체가 없다. 1960년대에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 같은 사람은 저자의 죽음을 말했다. 그는 작품을 쓰는 저자의 행위가 이미 일종의 ‘읽기’라고 했다. 그래서 텍스트는 창조되지 않고 구성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는 객관적인 ‘텍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포괄적 구도의 거래에 관한 룰을 세워라

파일의 시대에는 현실적으로 다운로드하려는 행위, 즉 내려받을 것을 수락하는 클릭의 행위와 저작권자의 권리를 연결해야 하는데, 아직 마땅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이 세상의 그 수많은 클릭에 어떻게 다 돈을 매긴단 말인가.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 우선 진행 중이다. 데이터베이스의 데이터베이스, 노래들의 목록을 전체적으로 골격지우는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 파일의 시대에는 온라인상에서의 분류가 제일 중요하다. 제대로 분류되는 순간 방향은 잡힌다. 엔드 유저가 클릭킹하는 행위와 창작자가 만드는 행위가 연결된다.

지난 2004년 1월, 전설적인 록 뮤지션인 피터 가브리엘과 브라이언 이노가 ‘온라인 뮤직 선언문’을 전세계에 배포했다. 이름하여 MUDDA(Magnificent Union of Digitally Downloading Artists). 그들은 이제 뮤지션들이 음반업자를 떠나 독자적인 망을 구축할 때가 왔다고 선언한다. 브라이언 이노는 “지금 이용가능한 가능성을 아티스트들이 재빨리 파악하여 손에 쥐지 않는 한 룰은 아티스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벌써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 그 오해는 분명 업자들이 조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클릭하여 내려받는 엔드 유저만이 아티스트에게 돈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으나, 그 중간 단계에 있는 거점들도 창작자에게 돈을 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건 분명하다. 가령 초고속 인터넷망을 까는 ‘망업자’가 있다고 해보자. K군이 초고속 인터넷을 방 안에 기를 쓰고 깐 이유는, 무엇보다도 내려받기의 속도 때문이다. 그렇다면 K군의 음악 듣는 행위는 일정하게 초고속 인터넷망 업자의 이윤창출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K군이 음악가에게 주어야 할 돈의 일부는 망업자들이 나눠내야 한다. 포괄적인 구도의 거래에 관한 룰이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엔드 유저나 엔드 유저들이 우글거리는 P2P 정거장만을 고소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음반업자들이 그 고소에 가장 적극적인데, 사태를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음반업자들이 얼마나 뮤지션들의 돈을 뜯어왔는가. 손톱만큼의 인세를 뮤지션에게 주어가며 자기들은 뮤지션이 버는 떼돈의 몇십 곱절을 쌓아왔다. 오히려 온라인 뮤직의 시대는 뮤지션들이 그런 업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뮤지션들에게는 음반시장의 불황이 둘도 없는 기회이다. 이 대변화의 시기에, 모험심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나.

글 성기완/ 음악칼럼니스트 · 사진 임민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