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의 물건들은 최소한 두 가지 상이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개입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읽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이다. 예를 들어 우산은 비가 내리는 세상을 비에 젖지 않고 건너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인 동시에, 우산 디자이너의 생각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존재조건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텍스트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책으로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는 수많은 정보를 담은 창고라 할 수 있다.
사물의 도구로서의 기능이 인간에게 부과되는 외부세계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서 세계를 우리의 의지대로 변형시키는 현실적인 목적에 종사한다면, 그것의 텍스트로서의 기능은 이렇게 조건지어진 우리의 존재양상을 돌이켜보는 사유에 종사한다. 전자가 ‘어떻게’라는 질문의 결과라면, 후자는 ‘왜’ 또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의 원인이다. 후자의 질문은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왜 우리는 비를 피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묻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방법론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물을 이처럼 텍스트로서 읽고 사유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존재방식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한동안 연재될 이 글은 우리 주위의 사소한 물건들과 사소한 현상들을 다룰 것이다. 주목받지 못한 채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하찮은 사물들 속에 세상에 관한 잊혀진 단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얘기가 나온 김에 우산을 텍스트로 읽어보자. 우산을 예로 든 것은 엊저녁 늦은 시간에 축축이 내리는 봄비 속에서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한적한 비탈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에 우산이 날아가는 낭패를 겪은 때문이다. 손잡이를 꼭 붙들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낚아챈 것처럼 우산살과 천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바람은 그것을 길가의 어두운 숲속 어딘가에 처박아버렸고 내 손에는 접이식 우산의 앙상한 하반신만이 남아 있었다. 금세 온몸이 젖어서 아내에게 구조요청을 했으나 나의 위치를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비를 맞으며 건물들이 있는 큰길까지 10여분을 걸어야만 했다. 이 무심한 자연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면구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련하게 젖은 몸을 웅크린 존재 하나가 자신의 발밑을 기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비의 신 아래서,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내가 이고 다니는 가장 오래된 우산인 머리카락과 눈썹에 의존하며 빗길을 걸었다.
예전에 잃어버리면 핀잔을 들어야 했던 우산은 이제 직원체육대회나 동창회 같은 데서 공짜로 나눠주는, 잃어버려도 표가 나지 않는 가치없는 물건이 되었다. 현관 신발장 속에, 자동차 트렁크 속에 대체 몇개의 우산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명색이 내 소유물이지 언젠가 내 손에 들어와 나의 시선 바깥에서 빈둥거리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는 물건이 되었다. 우산의 구조는 그것이 발명된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디자이너들은 그 무게와 부피를 줄임으로써 그것의 물건으로서의 가치와 존재감을 극소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얇은 천조각 하나로 국지적인 ‘맑음’을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존재가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고 건너가야 할 노천이 줄어들고 있음을 말해준다.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몇 발짝 안 되는 여백만이 아직 우리의 머리 위에 남아 있다. 지구 전체가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단단한 우산들로 덮어씌워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유 또한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 때로 우리는 머리 위의 우산을 벗어던지고 비 내리는 세상을 맨몸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