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게 좋아?”
“지금?…… 묻지마라.”
“그렇게 요란스럽게 결혼하더니 행복해?”
“행복? … 글쎄….”
<장미의 전쟁>에서 남편의 무능함에 화가 나서 집을 나온 미연(최진실)이 동생 미란(송선미)과 여관에서 하룻밤 지내며 나누던 대사였다. 분명히 수철(최수종)을 죽도록 사랑하여 독한 어머니, 허영심 여사(윤여정)를 배반하고 보란 듯이 결혼하여 잘사는 모습을 과시하고 싶었을 미연은 미란의 좋으냐는 질문에도 행복하냐는 질문에도 선뜻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저하는 태도는 정작 미란이 두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하(류진)와의 결혼을 강행하려고 하자 싸늘하게 충고하는 데로 이어진다.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과 행복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새로운 동반자를 찾았거나 찾아가는 딸들의 배후에 굳건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의 어머니, 허영심 여사는 남편의 여자에게까지 콩팥을 떼어주던 <꽃보다 아름다운> 어머니가 아니었으며 전처의 소생을 제 자식보다 안타깝게 여기며 키우는 <백만송이 장미>의 헌신적인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녀는 딸들이 자신의 주장과 요구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절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강인하고 비정한 현실적인 여인이었다. 전혀 희생적이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 앞에 우리는 불편해진다. 언제든 돌아와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후벼파도 그 속으로 뛰어들면 끝도 없는 안온함이 감싸줄 것만 같은 어머니가 그곳에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어머니가 부재하는 그곳에는 맥빠진 남성들의 군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알량한 정의감과 의협심에 무능력이 삼박자로 갖추어진 수철과, 안정된 집안에 기댄 허약한 귀공자 타입의 재하와, 가사와 아내의 병원관리에 말투까지 주부스러워진 미란의 아버지(주현)와, 허울뿐인 권위와 초라한 형편으로 호통은 언제나 종이호랑이뿐인 수철의 아버지(송재호)까지, 도대체 남성들은 그 당당함이 쭈그러들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꽃보다 아름다운’ 어머니들이 자식들과 함께 버둥거리며 살려고 애쓰던 때 그들은 아내들이 주는 인내와 안정을 딛고서 ‘바람 피우며 즐기고’ 살았기 때문이었는가?
그러나 강인하지만 불편한 어머니와 온순하지만 맥풀린 아버지들의 탄생은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인내심 있는 어머니가 남성의 권위로 먹고살던 아버지를 받쳐준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후자의 쌍이 60, 70년대 우리의 근대화 과정의 기틀이었으며 그들의 피와 땀으로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면 2000년대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전자의 쌍을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작 그뒤에 도사린 더 중요한 문제는 그 희생적인 어머니와 권위적인 아버지가 키운 아들과 딸들이 이제는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네들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보호벽과 아버지의 허상 앞에서 아버지가 되어야 할지 아버지를 거부해야 할지 방황하는 영원한 소년티를 못 벗어나고 있으며 그네들의 딸들은 어머니에게서도 아버지에게서도 이미 이탈하려는 조짐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씨네21> 488호 정승훈의 ‘영화읽기’에서). 아들은 나의 힘이라고 믿고 살아온 재하의 어머니가 바로 재하에게는 보호벽이자 성장하려면 넘어야 하는 장애가 되고, 남자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관념만을 물려준 수철의 아버지가 바로 수철에게는 버릴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아버지상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반면에 딸들은 용감했다. 사랑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정한 어머니라도 거칠 것이 없다. 현실의 거센 파고에 흔들리는 일이 있을지언정 그녀들에게 주요 문제는 이제 “사랑하고 행복하냐”는 것이다. 미연이 미란의 결혼 강행에 반대하는 것도 정작은 어머니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고 현실의 벽을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분명한 허영심 여사의 딸들이었다.
과연 그들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여 부부와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겠는가? 걱정스럽게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지금의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들은 인내심 있는 아내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권위로 무장된 아버지상을 극복해야 하는 아들들이 비권위적이면서도 당당하게 성장하여 그녀들의 동반자가 될 남성상을 정립하는 것을 아직은 꿈도 꿀 수 없다. 심각하게도 수철은 자신이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지 당황스러운 채, 그저 성장통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아버지를 기다려야 하는가….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