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개봉한 지 1년이다. 극장에 걸리기 전 흥행을 자신했는데.
평단에서 칭찬하고, 일반시사 반응도 좋았잖아? 그래서 난 믿었지. 그런데 결과가 그렇게 되니까 나도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거야.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싶었어. 영화는 이런 건가. 싸이더스에 전화해서 미스가 어디서 난 거냐 따지기도 했고. 얼마 전에 TV에서도 방영하기에 어떻게 나오나 싶어 봤는데. 근데 김이 팍 새더라고. 많은 장면이 편집이 돼버리니까. 우리 장준환 감독이 봤으면 잠 못 잤을 거야. 열딱지 떠가지고. 지난 이야기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그거는 온전히 해서 청소년들도 다 같이 봐야 할 영화라고.
<범죄…> 출연을 제의받은 것도 <지구…> 개봉 무렵이다.
지난해 이맘때 첫 시사할 때였는데. 차 대표가 내가 할 작품이 하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이번 시나리에는 고생하는 거 없을 거라고 하더니만 ‘아 한번 있네, 한번 있네’ 그러더라고. 크흐흐흐. 액션장면이 있다는 거야. 차 대표가 나한테 딱 맞는 역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 노하우가 있잖아. 딱 보면 사람이 영화 그 자체를 좋아하더만. 아티스트 개념이 있는 제작자야. 가려운 데도 긁어줄 줄 알고. 어쨌든 그때는 (시나리오) 준비단계여서 나중에 완성되면 책 보내준다고 하는데 감독이 누군지도 몰랐었고. 그러고나서 한참 있다가 책을 받았는데. 읽어보니까 어, 이거… 맛있게 썼더라고. 배우야 자신의 배역 위주로 읽잖아. 그렇게 읽어내려가는데 여러 가지 떠오르는 부분이 있어. 이쪽에서 밥먹은 지 오래되니까 알지. 아 요렇게 하면 이거 맛있게 할 수가 있겠다 싶더라고. 감이 와. 이게 두 번째 작품이구나.
강 사장과 김 선생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매력은 배우 입장에서 어떻게 다른가.
영화 한편 한 다음에 책들이 오더라고. 근데 다 <지구…>에 비하면 싱거워. 시시하다는 말은 아니고. 강도의 차이가 있는 거지. <범죄…>도 <지구…>에 비하면 싱겁거든. <지구…>의 강 사장 안에는 오만 가지 캐릭터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고. 그거에 비하면 조금 양이 안 차지. 근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지구…> 를 털고 가야 한다. 나만의 병이다. 빨리 정리 안 하면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은 거야. <범죄…> 같은 경우는 어떤 대목이 좋다기보다 연기자만이 느끼는 건데 ‘휘리릭’ 오는 선이 서는 게 느껴져. <지구…>야 처음 읽을 때는 난이도가 좀 심했지. 근데 이번에는 쩍쩍 접목이 돼. 오감이 작동하는 거지. 캐릭터 구성을 할 때 필(feel)이 떠오르면 나만이 아는 비표 개념의 낙서와 메모를 해놓는다든지 하는데 작업 전까지 뿔뚝뿔뚝 계속해서 떠오르더라고.
처음에 시나리오를 보고서 최동훈 감독에게 <히트>의 로버트 드 니로 이야길 했다던데.
일례를 든 거지. <히트> 보면 다 성공하는 게임인데 드 니로가 자존심 때문에 발길 돌려서 가잖아. 사랑하는 여자랑 비행장 나가면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는데 안 그러잖아. 배신당한 것에 대한 숙제가 미진하니까 풀고가야겠다, 자존심을 지켜야겠다고 가는 거지. 그 장면 봤을 때 너무 안타깝더라고. 드 니로야 극중에서 숙달된 조교니까 자기가 가서 한두놈 처치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하고 가는데 그게 불행의 구렁인 거지. 그걸 알면서도 남자의 자존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거고. 그런 부분이 내 대사에도 있더라구. 이 나이에 남는 건 돈, 배, 자존심밖에 없다고 하잖아.
시나리오 수정 중에 감독을 압박했다는 풍문도 있더라.
하하하하. 따진 적 있지. 14고부터 받았는데 가면 갈수록 점점 책이 이상해. 난 15고가 딱 좋아서 반했는데. 감독이 정리해서 새로 보냈습니다, 해서 보면 점점 안 좋아지는 거야. 내 역할에 대한 욕심을 빡 갖고 있는데 그게 흐려지더라구. 배우들은 다 손해 안 보고 싶어하잖아. 그래서 다음 버전이 나올 때마다 대비했다고. 책 비교해가면서 이거는 뭔가 체크했지. 아들 도빈이한테 이번에도 도움 많이 받았어. 야, 요거 한번 보면서 대비를 해봐라, 신이 바뀐 것 하고 대사 삭제된 것 하고 정리 좀 해달라 하고. 그러고나서 싸이더스에 가서 14고부터 그때까지 나온 시나리오를 한번에 쫙 펼쳐놓고서 이야길했지. 그런데 최동훈 감독이 들어와선 크게 변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근데 내 입장에선 이야기 구성을 바꾸니까 김 선생의 힘이 약해지고 모든 게 에피소드처럼 돼버려. 캐릭터가 축으로 서 있어야 드라마가 서는 것 아니냐 그랬더니 감독이 걱정하지 마십쇼 하더라고.
극중 김선생이 자주 쓰는 대사 중에 “청진기를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라는 게 있다. 그런 김 선생처럼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듯한데.
알아야 면장을 하지. 젊었을 땐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더라고. 다이얼로그 톤도 똑같고 어떤 작품에선 보이스를 변형해도 장난하는 것 같고. 보는 사람들에게 안 먹히고. 그런데 연륜이 쌓이니까 내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같아.
캐릭터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아니 저럴 수도 있다 하는 추리를 하는 거지.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인물을 구상하듯이 배우도 마찬가지라고. 감독이 시나리오 쓸 때의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 어떤 배우들은 여기저기 찾아다닌다고 하더라고. 실제 저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관찰하고. 한데 난 그렇게 하는 건 좋지만 어려운 발상이라고 봐. 어떤 틀에 넣어야 하니까. 뭘 발견하면 저거구나 해서 그 사람의 형태에 자길 넣잖아. 난 좀 반대인데 그런 게 있겠다 싶으면 그걸 가져와서 내 가슴에다 붙이는 거지. 그래서 변신이라는 말이 웃기다고. 조금 다른 맛을 보여줬다 뭐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장준환 감독과 최동훈 감독, 두 사람 모두 영화아카데미 출신 신인감독이다. 작업 방식에 차이가 있다면.
최 감독은 리허설할 때 자기가 써준 거는 변형을 안 하는데 그거 아닌 부분은 프리(free)하게 배우들한테 맡겨. 전폭적으로 주는 거지. 배우 거를 다 뺏어먹는다고 할까. 그래서 편하고. 장준환 감독도 배우 피 빨아먹는 건 다르지 않는데 자기 고정 틀이 좀 강하지. 릴렉스하게 뽑아먹는 게 아니라 배우와 대립각이 서게 되니까. 그런 건 성격 차이겠지. 장단점이 있다고 봐.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서 즉흥적인 요소도 빼놓을 수가 없지. 박신양하고 염정아가 하는 걸 보면서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하는 대사가 있거든. 그건 애드리브야. 두 사람이 벌이는 수작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지. 근데 애드리브 같은 것도 준비된 상태에서 현장에서 접목이 돼야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돼.
알코올 촬영을 한 적도 있다던데.
최 감독이 그래? 있어. 몇번. 내가 엉덩이가 질기거든. 주책없이 말이지. 한번은 마시다가 최 감독이 ‘선생님 이젠 자야 해요’ 하고 징징대. 물론 배우야 잠깐잠깐 눈 붙일 수 있는데 감독은 안 되니까 그 마음이야 알지. 아유, 그래도 그렇지. 울긴 왜 울어. 하하하. ‘그래 알았다. 요거만 먹자’고 한 게 아침까지 들이켰더라고. 우리야 풀어만 주면 현장에서 연기가 슬슬 나와요. 만취만 안 하면 되지.
대사 톤이 독특하다. 낮게 깔리다가 고성이 터져나온다. 강약을 주는 포인트도 일반적인 연기와 좀 다른 것 같다.
배우들이 생각하는 건 감정의 극대화거든. 이 단어에 악센트를 주면 어떤 효과가 나온다 그런 거 다 알지. 주어냐 목적어냐 동사냐 그중에 어디에 힘줘야 모양새가 좋냐. 다른 배우들하고 좀 다른 건 내가 젊었을 때 드라마에서 목적극을 많이 했거든. 나운규, 이상화, 이중섭 등등. 다 고뇌하는 지식인이고 천재적인 예술가들이잖아. 이 사람들이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라고.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이 사회적 여건에서 승화가 안 돼서 전쟁이나 그런 것들이 압박을 하니까. 나중에는 미쳐버리는 사람들도 많고. 하여튼 그런 역 했던 게 도움이 된 거 같아. 요즘에는 다들 생활에서처럼 대사를 치고 찍찍 뱉는데 극적으로 리얼한 톤이 따로 있거든. 오버하고는 다른 또 다른 리얼함이 있다고 봐요.
액션장면 촬영 때는 어려움이 없었나.박신양하고 비 맞으면서 남산 필동 아래서 액션장면 찍는데 그때 첫 추위가 왔을 때야. 3일 내내 나이트신인데 힘들면서도 재밌더라고. 힘들어도 스트레스 안 받으니까 좋지. 박신양이 워낙 운동신경도 있고 자신에 넘쳐 있으니까 분위기도 무르익어가고. 나도 그래요. 대역 써줬으면 몸이 편할 텐데. 최 감독이 내가 하길 원했으니까. 또 내 몸이 움직여지니까 나도 하는 거지. 이 작품 나오면 액션쪽에서 많이 올 것 같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닌데. 이를 어째. 이 나이에 액션쪽으로 가면 어떻게 감당하지. 형사물 나오면 바로 캐스팅될 것 같은데.
몸이 탄탄하다.
(배우한테) 양식이니까. 건강관리를 해야지. 그 전에도 좀 했는데 신경을 쓰게 된 건 <파랑새는 있다>에서 백 관장 맡으면서 신경이 좀더 쓰이더라고. 역할이 관장이었잖아. 화장실에서 서너놈 처치할 정도는 돼야 하니까 그때서부터 보강을 좀 했지.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그냥 했지. 하하하. 젊었을 때는 물불 안 가리잖아. 만사 용기백배하고 쇠를 삼켜도 녹이는 그런 때 아닌가. 한번 접근해보고 싶더라고. 그 세계에. 근데 그때는 연극영화과가 얼마 안 생겼던 때인데. 대학 갈 무렵, 연극이나 영화를 좋아한데다, 그게 좀 진취적인 학과구나 싶더라고. 그래서 갔지.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있는 애들이 많이 왔더라고. 나는 완전히 불모지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경우야.
브라운관에서 활동하는 동료 배우들에 비해 출연작이 적다.
겹치기를 잘 안 했으니까. 간혹 있었던 해가 있긴 한데. 그럴 때도 사극 하나 현대물 하나. 뭐 이렇게 갔어. 동료들이 내가 이런 소리 하면 왜 저렇게 틱틱거려 할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놈으로 겹치기 하면 나도 힘들고 시청자들도 식상하잖아. 가뜩이나 시장도 좁은데. 그리고 한 작품 해도 축을 이루는 역할을 하다 보니까 하려고 해도 스케줄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요즘 안 보이십디다 했던 분들이 있어. 요즘 너 뭐 먹고사냐 뭐 그런 말이지.
김 선생처럼 배신을 경험한 적이 있나.
나도 아픔 같은게 있거든. 전엔 캐스팅이 됐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이상한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그래서 불이익을 보는 경우가 반복된 적도 있었고. 정상적으로 일이 이뤄져야 하는데 비정상적인 것이 개입해서 망가뜨리는 일이 많았거든. 그럴 때마다 완전히 돌았지. 사회가 이런 거구나 싶고. 그래도 필이 안 오면 캐스팅 해달라고 달려가지 않으니까 다들 이상하다고 그랬어. 자존심 건드리면 우린 안 하거든. 그럴 때는 맘이 내키지가 않네요 하고 거절도 하고. 이제는 눈에 다 보여. 이 사람이 날 필요로 한다, 진실성이 없다, 그냥 이용가치 때문에 접근했구나 다 알아. 그래도 나를 필요로 하면 활용하라 이거지. 다만 스트레스는 주지 말고.
<범죄의 재구성> 흥행은 어떨까요.
아이고. 그런 거는 이제 묻지 말라고…. 얼마 전에 차 대표하고 통화한 적 있는데 영화 잘 나왔다고 나보고 배역 운이 있다고 그래. 그래서 ‘지난해에 앓을 만큼 앓았구요, 담담합니다 담담해요’ 그랬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그랬어. 지난번엔 (영화가) 안 나와서 안 됐나? 크하하.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죠. 영화사가 돈 좀 많이 가져갔으면 싶고. 그래야 좋은 작품 나오는 거고. 그래야 배우 입장에서도 좋은 기회가 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