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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방가르드 회고전’ 세 거장의 대표작 18편 상영
홍성남(평론가) 2004-03-30

잃어버린 매혹의 시대로의 여행“영화는 시를 위한 가장 강력한 매체이다”라는 문장을 실제로 쓴 사람은 장 엡스탱이었지만 아마도 이것의 요체에 대해서는 장 비고도, 그리고 장 콕토도 동의하지 않았을까 싶다. 엡스탱, 비고, 콕토는 세인들로부터 우선 영화의 시인들이라고 불렸던 시네아스트들이다. 그건 영화 만들기를 통해서 그들이 공히 고심했던 것이 자유롭게 눈을 위한 글을 쓴다는 것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아니면 경험적으로든 그들은 자신들이 이용할 언어에 대한 성찰에 이르려 했고 그로부터 나온 자신들의 혁신적인 문체로 상상력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면서 그들만의 매혹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그래서 그 시인들은 아방가르디스트들이면서 시각적 몽상가들이기도 했다. 엡스탱의 죽음에 즈음해 콕토는 그에 대해 쓴 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이미지들과 리듬은 노화를 겪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아주 우아하고 힘이 있는 리듬과 이미지를 발견하고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문장 역시 글의 대상이었던 엡스탱만이 아니라 글을 쓴 콕토와 그리고 여기엔 언급되어 있지 않은 비고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렇듯 혁신적이고 몽환적이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매혹적으로 비칠 엡스탱, 비고, 콕토의 세계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장 엡스탱, 장 비고, 장 콕토 회고전’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이 세 거장들의 대표작 18편이 소개될 이 행사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27일부터 4월7일까지 열린다.

<제15회 문화학교 서울 영화주간 "프랑스 아방가르드 - 장 엡스탱, 장 비고, 장 콕토 회고전>

□ 상영일시 : 3월27일(토)~ 4월7일(수), 총 12일간□ 상영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

상영일정

오후 1시

3시

5시 30분

8시

3월27일(토)

*섹션1

라탈랑트

미녀와 야수

28일(일)

오르페

충실한 마음

어셔가의 몰락

29일(월)

30일(화)

쌍두 독수리

무서운 부모들

라 벨 니베르네즈

31일(수)

*섹션1

오르페

6 ½ × 11

4월1일(목)

미녀와 야수

라탈랑트

파스퇴르

세계의 끝

2일(금)

오르페

무서운 부모들

*섹션1

삼면거울태풍

3일(토)

시인의 피

충실한 마음

미녀와 야수

쌍두 독수리

4일(일)

6 ½ × 11

파스퇴르

라 벨 니베르네즈

라탈랑트

5일(월)

삼면거울태풍

어셔가의 몰락

오르페

무서운 부모들

6일(화)

세계의 끝

쌍두 독수리

*섹션1

7일(수)

미녀와 야수

라탈랑트

시인의 피

□ 섹션1 = 니스에 관하여, 장 타리스, 물의 왕, 품행제로 □ 주최 :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 후원 : 주한프랑스대사관,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문의 : 02-743-6003(문화학교 서울), 02-720-9782(서울아트시네마) www.cinematheque.seoul.kr

장 엡스탱(1897-1953) 탐구하는 시인

<어셔가의 몰락><라 벨 니베르네즈> (위부터)

장 엡스탱은 1922년에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대한 일종의 다큐드라마인 <파스퇴르>로 영화감독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여러 감독들이 촬영현장에서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그들의 작업을 직접 도와주거나 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이런저런 통로로 엡스탱이 소개를 받게 된 그 감독들이란 제르멘느 뒬락, 아벨 강스, 루이 델뤽, 마르셀 레르비에 같은 사람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프랑스 인상주의자’라는 항목 아래 두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겉보기에도 이들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안에 있었던 엡스탱을 두고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엡스탱의 대표작을 이야기하라면 많은 사람들은 <어셔가의 몰락>(1928)을 언급할 것이다.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겨낸 이 영화에서 엡스탱이 추구한 것은 아마도 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들의 ‘순수한’ 운동을 보여주고 그렇게 해서 보는 이에게 영화적인 감흥을 선사하는 것이었을 듯싶다. 이것을 그저 ‘시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가시적인 세계를 넘어선 어떤 것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 정도로 본다면 엡스탱을 인상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비평가들은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비교해 엡스탱에게는 좀더 세심한 시선을 들이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건 그가 강스나 레르비에처럼 단지 회화적인 이미지만을 추구한 것만이 아니라 영화 고유의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실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엡스탱은 이론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이론에서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 ‘포토제니’(Photogenie)였다. 그의 포토제니론은 모든 예술은 자율적이고 고유한, 그것만의 배타적인 영역이 있으니 영화도 마찬가지로 포토제니라는 영화만의 자산, 혹은 잠재력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엡스탱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몽타주, 리듬, 이미지, 시간 등에 대한 실험은 영화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 위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 미트리 같은 영화학자가 영화에 대한 문학적인 개념과 최초의 영화 미학자들 사이의 분기점 위에 엡스탱이 위치한다고 말하는 건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다.

엡스탱이 주된 활동을 보였던 1920년대의 프랑스란 당대의 문화적 지형 위에서 영화가 특히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시공간이었다. 영화에서 왕성한 실험이 일어나고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적 풍요로움이 벌어지던 게 그때 그곳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과 창작을 넘나들면서 영화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실행했던 엡스탱은 1920년대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장 비고(1905∼934) 아나키스트의 로맨틱한 시정(詩情)

<라탈랑트><품행제로>(위부터)

장 비고를 두고 “성(聖) 비고”라고 불렀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아마도 비고를 가상의 자기 형 정도로 생각한 이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트뤼포는 비고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정확한 지적들을 하곤 했는데, 트뤼포가 비고에 대해 남긴 인상적인 말들 가운데에는 이런 것도 있다. “비고는 우리보다 더 격렬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른 죽음을 맞기 전까지 영화에 열정을 바친 삶을 살았고, 전체 러닝타임이라고 해봤자 3시간도 안 되는 고작 네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그것들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보석들로 세공해냈으며, 사는 동안 비난과 상영금지와 재편집 등으로 얼룩진 스캔들에 연루되었다가 사후에야 복권되는 드라마틱한 영화적 삶의 경로를 거쳤던 비고에게 트뤼포의 언급은 꼭 들어맞는 것이다.

영화사의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 중 하나인 비고는 우선 아나키스트적인 시성을 선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예컨대 그의 첫 번째 영화인 <니스에 관하여>(1929)는 어느 도시에 대한 그저 아름다운 보고서가 아니라 꽤 공격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니스를 어슬렁거리는 부르주아 관광객의 게으름과 뒷골목에 사는 노동계급 하층민들의 공동체 정신을 정묘하게 병치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함께 무언가 통증도 느끼게 만든다. 비고의 반항하는 시선에 대해서라면, 체제에 대한 격한 반항을 찬양하고 있는 <품행제로>(1933)에는 더이상 말할 것도 없지만, 앞의 영화가 상영금지를 당하자 그와는 달리 애초부터 문제없는 영화로 의도된 <라탈랑트>(1934)에서도 사라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기존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도피하기를 꿈꾸는 무정부주의적 열정의 아름다운 발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비고의 영화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흔히 우리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기 쉬운 두 가지 미학적 태도, 즉 리얼리즘과 유미주의가 우아하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탁하고 사소해 보이는 리얼리티를 수면 위로 흐르는 관능적인 시로 옮겨낼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팍팍한 현실과 꿈꾸는 듯한 초현실 사이의 경계 영역에서 자유로이 유영할 줄 알았다. 비고는 리얼리즘을 몽환의 시학으로 재창조할 줄 아는 영화사의 드문 시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후대의 많은 영화감독(지망생)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면서도 여간해서는 그들로부터의 극복이나 모방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은 시네아스트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이 그랬듯이.

장 콕토(188-1963) 영화로 꿈을 꾸는 몽상가 시인

<미녀와 야수><오르페>(위부터)

장 콕토가 쓴 구절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있다. “나는 다른 세계, 시간과 공간이 온전히 내 것인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콕토라는 한 예술가를 정의한다면, 아마도 이 문장에서 꽤 적절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창작을 통해서건,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픽션 세계를 통해서건, 자기만의 세계, 콕토적 세계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세계에 발을 딛고자 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콕토적 세계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가 만든 영화들, 특히 <시인의 피>(1930), <오르페>(1949), <오르페의 유언>(1960)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본 사람이라면 그건 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일상적인 세계와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지대(zone)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콕토는 영화뿐만이 아니라 소설, 문학비평,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예술적 영역에 손을 댄 이른바 ‘르네상스 맨’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두고 시인이라고, 소설의 시, 회화의 시, 비평의 시, 영화의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분명히 정의했다. 시인을 이야기했을 때, 그가 머릿속에 그린 것은 무엇보다도 시공간과 금단의 경계를 드나들면서 수난을 겪고 그러면서도 진리를 밝혀내려고 하며 그런 과정 가운데 몇번씩이나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존재였다. 콕토가 자신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때에, 그것도 다른 예술활동 분야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난 뒤에, 과감하게도 영화제작에 뛰어든 것은 영화가 꿈의 메커니즘과 닮은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화가 꿈의 세계, 몽상의 세계, 마술의 세계, 비합리의 세계를 그려 넣을 수 있으면서도 그런 세계에다가 현실감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매체라고 간주했다. 장 뤽 고다르의 표현을 쓴다면, 그렇게 시네마 베리테와 시네마 라이(cinema-lie)의 세계가 잘 겹쳐지기에 콕토에게 영화란 시인을 위한 완벽한 매체였던 것이다.

비록 적은 편수임에도 모두가 눈여겨볼 영화들로 만든 콕토였지만 한사코 자신은 영화를 만드는 이로서는 ‘아마추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걸 붙잡고 이야기하자면, 그의 첫 영화인 <시인의 피>가 전위영화처럼 보인 건 그가 영화에 대해 문외한이었기 때문이고, 그의 다음 영화들이 형식에 관해서는 다소 혁신적이지 못한 건 아마추어 영화감독이란 자책에서 그가 벗어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두고 아마추어 시네아스트라고 한들, 그 아마추어가 고다르의 표현대로 영화의 창조를 위해서는 멜리에스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교훈을 몸소 보여주었고, 또 아벨 강스로부터 라울 루이즈에 이르는 몽상가 시네아스트의 한 중요한 지점에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콕토는 감화를 줄 수 있는 딜레탕트였던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