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을 보고 ‘행복하게 늙어가기’를 고민하다
90년대 이후 화장품 업계의 대박 상품은 단연 링클케어 제품이다. 10년 전만 해도 주름살 개선 화장품은 엄마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 나이 20살부터 노화는 시작됩니다!” 이 뒷골 당기는 광고 카피에 충격 먹은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아이크림을 벌써부터 발라야 해?” 나의 아둔함을 향해 날아온 메가톤급 어퍼컷, “아직도 아이크림 없단 말야?” 스무살 이전까진 어른되기에 골몰하다가 스무살 이후에는 늙음에 대한 공포로 ‘여생’을 점철해야 하다니. 미래를 향한 투자를 위해 지불되는 건 화폐만이 아니다. ‘퓨처 인베스트먼트’를 위해 희생되는 지금, 이곳. 노화방지 프로그램을 철저히 실천할 성실함이 없는 난, 30대의 행복, 40대의 행복, 50대의 행복을 한컷한컷 만끽하는 쏠쏠함에 곁눈질이 간다.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의 코믹로맨스보다 눈에 띈 것은 ‘나이 든 여자’의 행복 찾기다. 다이앤 키튼이 한여름에도 터틀넥을 입는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열쇠는 두 가지로 읽힌다. 첫째, ‘몸’의 발견. 이혼 뒤 “루주 칠하고 휘파람 불 때” 외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입술의 감각. “당신 입술, 부드러워”라는 남자의 칭찬으로 그녀의 몸의 발견은 불붙는다. 둘째, ‘우는 법’의 발견. 56년 만의 첫사랑에게 무참히 차이고 나서야, 피도 눈물도 없던 그녀는 맘껏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평생 고수해온 못 말리는 금욕주의와 쿨한 스타일을 구기며 펑펑 울어대는 장면. 이보다 더 쪽팔릴 수 없는 생애 최악의 눈물 퍼레이드를 통해 그녀는 생애 최고의 희곡을 완성한다. 키아누 리브스가 그녀에게 홀딱 빠지는 건 그의 눈이 삐어서가 아니다. 그녀는 꽁꽁 감싸맨 눈물과 몸의 매듭을 풀어줌으로써 진정 젊음과 아름다움을 쟁취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구질구질하게 늙어가지 않기 위해’ 갖춰야 할 소도구들이 너무 많다. 다이앤 키튼은 여전히 럭셔리한 몸짱이다. 아늑한 별장과 최고의 희곡작가라는 레테르까지 소유하고 있다. 잭 니콜슨 역시 잘 나가는 음반회사 경영자이며 예순이 넘도록 20대 여성만 꼬드겨온, 평생 바람 피우다 죽어도 좋을 늘어진 팔자다. 그들의 사랑을 세련되게 채색하기 위해 너무 많은 소유의 목록과 무거운 미장센이 동원된다. 이 영화의 아가씨판 타이틀은 <곱게 늙기 위해 갖춰야 할 너무 많은 것들>이다. 주름살을 돌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연애하며 신명나게 노동하는 할머니가 되고프다. 10억원짜리 적금통장보다는 나달나달해진 여권이 갖고 싶다.
내게 행복하게 늙기 위한 비결을 전수해준 텍스트는 <죽어도 좋아>였다. 이 영화에선 낭만적 사랑을 위한 모든 피곤한 과정이 생략된다. 그들은 눈치 보며 밀고 당기는 자존심 쟁탈전의 비경제성을 이미 깨달았기에, 첫눈에 필이 꽂히자마자 아쌀하게 동거에 들어간다. <죽어도 좋아>에는 어떤 영화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삶의 미니멀리즘’이 있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 필요한 건 오직 이불 한채와 작은 방 하나다. 간결하게, 간결하게, 더이상 줄일 수 없게! 그들은 빨간 고무 다라이 하나만으로 쉽게 에로틱 무드로 전환하며 서로의 몸을 만지고 호흡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들은 최소한의 질료로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비법을 실천한다. “우린 날마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안 혀요.” 이들은 한살이라도 젊어 보이려 버둥대지 않는다. 하루하루 행복에 겨운 나머지 주름살을 고민할 짬조차 없다. <죽어도 좋아> 덕에 처음으로 나이 먹는 일이 좋아졌다. 나를 옭아매는 강박과 히스테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곧 나이 먹는 일이니까. 부지런히 늘어갈 나의 주름살들이 부디 링클케어에 시달리지 않기를. 내 이마에 팬 주름살들이 벗들의 지친 발걸음을 쉬어가게 할 나른한 주막이 되기를.
정여울/ 미디어 헌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