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i l m o g r a p h y
1998 <하우등> 1998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9 <유령> 2000 <반칙왕> 2000 <순애보> 2000 <시월애> 2001 <킬러들의 수다> 2002 <챔피언> 2003 <지구를 지켜라!> 2004 <태극기 휘날리며>
가끔 외국인이 한국영화를 보며 놀랄 때가 있다. 제작비가 얼마인지 듣고나면 그렇게 적은 돈으로 어떻게 이런 화면을 만들었는지 혀를 내두른다. 작품성을 떠나서 그들 눈에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제작스탭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들의 피와 땀이 수공업으로만 가능한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감독 홍경표(42)도 그런 사람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장에서 크레인이 넘어졌을 때 그가 무엇보다 먼저 챙긴 건 좀전에 찍은 화면이 카메라에 제대로 담겼는가였다. 자기 일을 위해 희생과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들이 아니라면 한국영화는 지금처럼 급속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1998년 <하우등>으로 데뷔한 홍경표는 정식 영화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유명한 촬영감독 밑에서 일한 적도 없는 인물이다. 촬영부 조수로 일하다 미국에 건너가 독학으로 촬영감독이 된 그는 <처녀들의 저녁식사>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김형구와 더불어 젊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촬영감독으로 떠올랐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의 10번째 작품.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평단의 입장은 엇갈리지만 확실히 홍경표 촬영감독의 주가는 한층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여준 화면이 할리우드의 기술 수준에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홍경표가 말하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과 촬영감독으로서 고민하는 한국영화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베꼈다고? 좋은 건 모두 실험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관객 반응을 보면 다수가 열광하는 분위기지만 찬반이 엇갈리는 의견도 적지 않다. 특히 전쟁신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 그렇다. 한국영화로 이만큼 했으면 대단하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새로울 게 없고 최근 전쟁영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반응을 접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모르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비롯해 다른 전쟁영화와 비교하는데… 제일 잘 찍은 전쟁영화라고 하는 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인데 왜 잘 찍었다고 하는지 들여다봐야 할 것 아닌가. 전쟁의 참상을 정확히 재현했기 때문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최고라고 얘기하는데, 메이킹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서 배운 점이 많다. 제일 잘 찍은 영화라고 하니까 당연히 배워야 되는 것 아닌가. 전쟁신만 국한했을 때 <라이언 일병 구하기>뿐만 아니라 <밴드 오브 브라더스>도 참조했고 백병전 장면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가 굉장하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전쟁신에 자극받은 게 많다. 기법에서 참조한 점도 많다. 하지만 개각도 촬영을 보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베꼈다고 말하는 식은 동의할 수 없다. 한국영화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나 <친구>도 개각도 촬영을 한 영화다. 나도 <지구를 지켜라!> 마지막 장면에서 개각도 촬영을 했다. 지금은 개각도 촬영이 보편적인 촬영기법이 됐다. 감독들은 항상 새로운 스타일을 원한다. 예전에 왕가위 영화 나온 다음에 저속촬영이 보편적인 기법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마침 전쟁영화를 찍는다면 개각도 촬영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그걸 보고 베꼈다고 하는 건 이해를 못하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다시 보면 알겠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와 많이 다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엄청난 스케일이 있지만 우리는 사실 스케일은 없는 영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핸드헬드로 흔들면서 투박하게 만든 영화다. <풀 메탈 자켓>도 참조했다. <풀 메탈 자켓>은 로앵글로 찍어서 전쟁신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작품인데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가 현장에서 직접 찍어보니까 로앵글로 찍는 게 당연한 거더라. 총알이 위로 날아다니는 현장에서 카메라 혼자 서서 찍으면 이상하다. 내가 몸을 엎드리면 총알이 내 위로 날아다니는 느낌이 살고 그만큼 사실적이 된다. 사실 그래서 <지구를 지켜라!>부터 카메라를 들고 낮게 뛰어가는 연습을 했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오토바이가 풀밭을 헤치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다른 장비를 쓴 게 아니라 나랑 촬영부 조수 한명이 카메라를 들고 뛰어가면서 효과를 만든 것이다. 그때 이미 <태극기 휘날리며>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도해본 거다.
물론 다른 영화에서도 개각도 촬영이 많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만큼 많이 쓴 영화는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일반인에겐 개각도 촬영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데 원리를 설명해줄 수 있나.
사진을 찍는 카메라는 셔터가 닫혔다 열리면서 빛이 들어오는데 영화를 찍는 카메라는 미러가 돌아가면서 상이 맺힌다. 미러는 180도, 그러니까 반달모양인데 이 미러가 일정속도로 돌면서 부드러운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 미러를 90도, 45도, 25도, 이런 식으로 줄이면 움직임이 분절적으로 보인다.
이번에 많이 쓴 기법이 핸드헬드와 개각도 외에 이미지 셰이킹이라는 게 있던데 이미지 셰이킹은 어떤 것인가.
카메라 밑에 놓고 진동을 주는 장치다. 카메라 무게가 25kg 정도 되니까 떨게 만드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아니라 울렁울렁하는 경우가 많다. 송선대 기사가 이 진동장치를 만들었다. 원격조정장치까지 만들어서 찍어보니까 작동을 하더라. 폭파장면 같은 경우 지축이 떨리는 느낌이 나는데 이미지 셰이킹의 효과다. 사실 외국에서 이 장비를 빌려오려고 했는데 3주 이상 렌트가 안 된다고 해서 직접 만들어 썼다. 송선대 기사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서 청계천에서 모터를 사다가 한달 만에 만든 거다.
톰 행크스에겐 없고 장동건에겐 있는 것
확실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다르다고 느낀 점이 있긴 하다. 뭐냐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장면은 별로 없고 전쟁신이 거의 인물에 밀착해서 찍혀 있다. 물량이 부족한 것을 감추려는 선택일 수도 있고 드라마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따른 선택일 수도 있다. 아주 가깝게 들어가서 찍는 것으로 두 가지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한 듯하다.
처음 영화 들어가면서 강제규 감독이나 스턴트맨들과 합의한 부분이다. 과연 할리우드와 차별화할 게 무엇인가, 했을 때 겁없이 무식하게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면 수천만달러 받는 주연배우, 톰 행크스 옆에 폭탄이 안 터진다. 하지만 우리는 한다. 장동건이 한다. 스턴트맨들이 하고 나도 한다. 그게 우리가 갖는 힘이다. 정말 종군기자처럼 근접촬영하면서 아수라장인 느낌을 담았다.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지면 무섭고 혼란스럽다. 그러면서도 찍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로앵글로 찍는다는 것도 그런 점과 연관되는 것 같다.
그렇다. 막상 찍어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더라. 저절로 몸이 숙여진다. 당장 내가 총알을 피해야되니까. (웃음)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드라마가 근접촬영을 원하기도 했다. 낙동강 전투만 봐도 카메라는 정확히 원빈만 따라간다. 전쟁의 참상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그것이 주인공들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니까. 장동건, 원빈말고 다른 사람은 보여줄 틈이 없다.
드라마로 보면 결국 두 남자의 이야기이고 멜로드라마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데 <태극기 휘날리며>는 홍 감독이 촬영한 영화 가운데서도 드물게 클로즈업이 많은 영화다. 신파라고 말할 법한 카메라 움직임이 많다. 이런 유의 영화를 많이 찍은 촬영감독이 아니라서 어땠는지 궁금하다.
맞다. 클로즈업을 굉장히 많이 썼다. 사실은 그게 강 감독 스타일이다. <쉬리>도 그렇다. 시나리오를 보면 클로즈업이 많이 필요하다. 감정을 내지르는 연기를 많이 하니까 카메라가 멀리 있으면 힘이 없다. 나도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다가갈 수밖에 없다. 다른 부분은 연기 안 하고 얼굴만 연기를 하니까 당연히 클로즈업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클로즈업이 많은 영화를 찍는 건 다른 영화와 상당히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이재용 감독의 영화랑 비교하면 재미있다. 냉랭하잖나. (웃음) 카메라도 안 움직이고 클로즈업도 안 쓰고. <순애보>, 그런 영화 찍다보면 클로즈업 들어갈 일이 없다. 주위 배경이 인물의 감정을 더 많이 표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