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이거 하나만 걸쳐요?” 얇은 환자복 위에 베이지색 스웨터만 달랑 걸쳐 입은 박솔미가 슬쩍 떠본다. 박정우 감독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전대성 촬영감독과 카메라 동선을 상의한다. 감독의 싸늘한 응대에 박솔미로선 눈을 흘기는 수밖에 없다.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건 이성재도 매한가지다. 날렵한 맵시의 양복 안으로 한껏 움츠린 어깨가 덜덜 떨고 있다. <빙우>를 찍으면서 로키 산맥의 한파 맛을 본 그도 짬이 나자 금세 카메라를 피해 모니터 옆 방한기구로 다가가 언 발을 쬔다. 하긴, <바람의 전설>에서 이성재의 발은 꽤나 중요하다. ‘스텝 삼매경’에서 또 다른 인생을 발견한 남자 풍식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촬영괄괄한 성격의 연화 또한 좀처럼 입밖에 꺼내지 않은 고단한 현실이 있다. 그녀가 주저하지 않고 풍식에게서 엑소더스의 키를 건네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2월15일 충남대학교 부속병원 옥상에 차려진 춤판. 전설적인 스텝의 소유자 풍식은 이혼당하고 집에서 쫒겨난 뒤 병원에 세간살이를 차린 신세다. 반면 여형사 연화(박솔미)는 상관의 부인을 농락한 풍식에게 접근해 범행 일체를 자백받으려 한다. 그러나 황홀한 춤의 세계는 현실의 유일한 도피처라 할 만큼 안락하다. 풍식에게서 자이브를 배우는 순간, 연화는 그를 먹이가 아니라 파트너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단에서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성석제의 단편소설 <소설 쓰는 인간>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 등의 시나리오를 쓴 박정우 감독의 데뷔작. “다들 제비라고 부르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기는 풍식”을 통해 박 감독은 “엔도르핀 가득한 세상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풍식이 전국 각지를 돌며 왈츠부터 자이브까지 섭렵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이성재는 촬영 전 하루에 7시간씩 연습했다고. 안무를 맡은 샤리 권씨는 “몸치였던 이성재씨가 이제는 선수가 다 됐다”고 말할 정도니 그의 리드미컬한 스텝을 기대할 일만 남았다. 개봉은 2004년 4월2일이다.
사진 이혜정·글 이영진
◆ 촬영장면을 모니터로 검색한 뒤 담소를 나누는 박정우(맨 왼쪽) 감독과 배우들. (왼쪽 사진)
◆ 범행 일체를 자백받고자 탐색전을 펼치지만, 파란만장한 풍식의 인생에 휩쓸린다. (오른쪽 사진)
◆ 범행 일체단짝인 김상진 감독이 자신의 영화와 <바람의 전설> 중 어떤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불러오을지 내기를 걸어와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박정우 감독.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어야 할 라스트 댄스 촬영을 위한 후보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해서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