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 대상 국산 TV 애니메이션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 이 나오기까지
“그 애가 올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 아이에게선 향기가 느껴져. 은은하지만 아주 독특한 향기.” 원형의 미래도시제논의 흐린 상공을 가르며 떨어진 한 줄기 빛이 춤추듯 움직이는 영상 위로 흐르는 내레이션. 알고 보면 극중인물에 대한 설명이지만,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첫 대사는 흡사 시청자에게 내미는 소개장 같다. 지난 5월3일부터 매주 목요일 6시 KBS에서 방영되는 새 국산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이렇게 첫선을 보였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뭔가 ‘독특한 향기’를 예고하는 주문
같은 서두와 함께.
가지 않은 길- 청소년 애니메이션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국내애니메이션업체 동우애니메이션에서 2D디지털로 제작한 26부작 TV애니메이션 시리즈. 91년에설립된 이래 <맨인블랙> <고질라> <재키 챈> 등 컬럼비아를 비롯한 미국작품과 <빨간 망토 차차>
등 일본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으로 제작경험을 쌓아온 동우애니메이션이 처음 선보이는 창작물이다. 4시부터 7시까지, 아무래도 폭넓은 시청자들을
확보하기 어려운 방영시간대를 배정받는 국내 TV애니메이션의 경우,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의 어린 시청자들을 고려한 기획이 대부분인 현실. “청소년들이
볼 만한 작품이 없는” 상황에서, “좀 어렵더라도 청소년들, 일본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들도 즐겨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게 김영두
동우애니메이션 대표의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동우애니메이션이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원안을 기획한 JRN과 공동제작에 나선 것은 지난해 초. 하지만 확보된 어린이
시청자들에 비해 얇고 불투명한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위험부담을 안은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제작 초기부터 산고를 겪었다. 데모가
좋은 반응을 얻었음에도 편당 1억원씩 약 26억원에 이르는 제작비 마련이 어려웠고 극장용 장편으로의 전환, 일본과의 합작 추진 등 몇 차례
방향 수정을 거듭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JRN이 손을 떼면서 거의 사장되기에 이르렀던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 기획은 지난해 말 KBS의 제작지원 공모에 당선되면서 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KBS에서 10억원을 지원받은 동우애니메이션은 JRN으로부터
판권을 샀고 4월로 예정된 빠듯한 방영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올 초부터 제작에 들어갔다. 1주일 만에 캐릭터 수정을 끝내고, 2월부터 콘티
및 실제작에 들어간 결과 현재 7화까지 완성된 상태. 구로동에 위치한 동우애니메이션 건물, 4층에서 8층까지 4개층에 걸친 작업공간에서는 지금도
나머지 분량 제작이 한창이다.
SF와 미스터리의 접목
10∼15살이라는 비교적 고령(?)의 시청자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만큼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기존 국산 TV물과 다른 전략을 고민한흔적이 엿보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국내애니메이션으로는 보기 드물게 SF와 미스터리를 접목한 시도.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컴퓨터
네트워크 속을 떠돌며 현실세계를 위협하는 소녀 영혼과 이를 둘러싼 비밀을 풀어가는 10대 게이머들의 대결을 소재로 한다. 무대는 2097년,
화산 분화구를 막은 위에 건설된 첨단 도시국가 제논. 제논의 10대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터넷 게임 동아리 ‘스피어헤드’의 성원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큼 발군의 기량을 자랑하는 게이머들인 슈도, 민트, 베베파우 등이 주인공이다. 전설적인 게이머 모데라토가 이들을 제논 외곽의
폐쇄된 위성안테나 기지에 불러 모아 자신이 만든 ‘레몬 게임’을 시험하게 한다. ‘레몬 게임’은 접속하는 게이머가 사이버공간에서 로봇으로 변신해
가상의 적과 싸우는 게임의 일종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없던 레몬 향기와 함께 소녀의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게임 속 적이 더 막강해지고
게이머가 실제로 다치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소녀의 환각은 현실세계의 컴퓨터 시스템에도 심각한 이상을 일으킨다. 컴퓨터 시스템 장애와 사고가
거듭되고, 사원의 샘물까지 핏빛으로 물드는 괴현상이 일어나자 제논은 수십년 전 화산폭발과 같은 대재앙을 예감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레몬 게임
속 소녀가 현실의 위험을 부른다는 것을 눈치챈 스피어헤드 팀원들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연구하는 실험에서 죽어간 소녀의 과거와 이를 둘러싼
음모를 차례로 밝혀낸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경쾌하게
이처럼 컴퓨터 네트워크상의 존재, 기계와 인간, 게임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등을 다루는 설정이 낯설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오시이 마모루의<공각기동대>나 <아바론>, 혹은 <레인> 같은 일본SF애니메이션이나 <매트릭스> 같은 SF영화처럼
비슷한 모티브의 작품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로봇 메커니즘 위주의 아동물이 주류를 이뤄온 국산TV애니메이션의 흐름에서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주목할 만한 변주다. 진돗개와 소박한 동심의 우정과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은 <하얀 마음 백구>나 신종 생물과 인간의
전쟁, 인간사회의 암투에 휘말린 젊은 전사들을 통해 진지한 SF액션을 시도한 <가이스터즈>가 그랬듯이 국내의 창작애니메이션의 이야기
진폭을 넓히고 다양한 화법을 고민하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캐릭터나 배경, 화면 연출 등에서도 조금씩 드러난다.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캐릭터들은 판에 박힌 미소년,
미소녀 영웅들과 좀 다르다. 앞머리가 삐쭉 선 다혈질의 슈도는 잘생겼다기보다는 제멋에 사는 개성파고, 부스스한 머리에 턱수염이 까칠한 모데라토는
어수룩한 떠돌이의 이미지다. 스피어헤드의 막내이자 코믹한 감초 역할인 밤과 주근깨 소녀 푸딩도 미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나마 발랄하고 예쁘장한
민트나 수려한 모범생 캐릭터인 베베파우도 때로 희화화된 모습으로 망가지길 서슴지 않는다. 비교적 전형적인 미모를 고수하는 인물은 소녀 유령
코라와 수수께끼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체불명의 소녀 티엘 정도랄까. 전체적으로 미모보다 개성적인 외모와 성격을 강조한 인물들은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지향을 드러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기계와 인간 생체의 결합을 실험하는 문명의 이기에 희생된 소녀를 둘러싼 음모라는 암울한 소재를
다루되, 게임과 X스포츠를 즐기며 분방한 제멋에 사는 N세대의 경쾌한 이미지와 가벼운 개그를 배치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좀더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는 것이다.
소재의 무게와 미스터리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지나치게 심각해지는 것을 경계한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색깔은 배경에서도 마찬가지. 레몬
게임 장비가 설치된 안테나 기지나 비밀이 깃든 중세풍의 사원은 어두운 톤으로, X게임장이나 제논의 중심가는 화사한 톤으로 배경을 대비시켰다.
배경 중에서도 특히 게임이 벌어지는 기지 안팎이라든가 철골 구조물 등을 이용한 게임 속 가상공간은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 <아바론>의
애쉬처럼 게임기를 착용하고, 센서 장갑을 낀 인물들이 게임에 접속하면서 로봇 캐릭터로 변신하는 과정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 날렵한 로봇들의
액션도 기대 이상의 매끈한 영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련된 만듦새는 역동적인 게임 전투장면과 개성이 다양한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웃음으로
완급을 조절하며 숨은 음모의 실체에 다가서는 구성과 더불어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다.
<포켓몬스터>의 아성에 도전한다
지난 5월17일 3회분까지 방영을 마친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시청률은 6% 정도. 시청률 10%를 상회했던 <하얀 마음 백구>의성공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같은 시간대에 SBS에서 방영되는 <포켓몬스터>가 평균 시청률 20%를 맴도는 막강한 라이벌임을 감안하면
괜찮은 성적이다. KBS와 동우애니메이션의 인터넷사이트 및 애니메이션 관련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다. (안타깝게도)
국산애니메이션인지 몰랐다, 일본애니메이션 못지않게 잘 만들었다, 재미있다는 호평이 대다수. 김영두 대표에 따르면, MIPCOM 등 해외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 미국의 배급사와 20억원 상당의 판권계약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이 계약이 체결되면 KBS의 지원금을 제외한 16억원의 제작비를
상쇄하고도 수익을 남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7월경에는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 게임을 출시할 예정이며, 이후 청소년을 겨냥한 의류 및
핑거보드, 출판만화 등 캐릭터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작품에 힘을 실어갈 계획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차용한 개그 연출이 가끔 극의 리듬을 흐린다거나 과장법에 익숙한 성우들의 연기, 음향 효과의 미진함 등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이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을 일신하고 표현의 결을 좀더 풍부하게 가꿔가는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듯
하다. 촉박한 일정에 쫓기면서 놓친 부분도 있고, “청소년이라는 목표층을 생각하면서도 소수를 위한 작품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수위를 낮추기도”
했지만, 아쉬움은 과제로 남겨두겠다는 게 남종식 총감독의 말. 첫 술에 배부르긴 힘들고, “복습을 잘 해서 다음엔 같은 문제를 틀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에 대한 바람도, “잘 되는 것보다는 조금은 새로웠다는 인식으로 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나머지 23개의 이야기를 지켜봐야겠지만,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에서 풍겨오는 향기는 예사롭지 않다. 그러니 미리
실망을 ‘두려워 말고’(‘바스토프’는 ‘Be A Stranger to Fear’, 의역해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극중에 쓰인다)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에 접속한다면, 은은하지만 독특한 제 향을 찾아가는 창작 애니메이션의 더딘 걸음을 함께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황혜림 기자
남종식
총감독 인터뷰
"캐릭터가 모두 예쁘란 법 있나"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총감독을 맡은 남종식 감독은 컬럼비아의 <맨 인 블랙> 등 해외의 유수 애니메이션업체의 하청작업을통해 경험을 쌓아온 애니메이터다. 국산 장편애니메이션 <아마겟돈>의 act1의 작화를 맡은 바 있으며, 91년부터 동우애니메이션에
합류해 현재 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어느덧 경력 15년이 넘는 중견 애니메이터가 됐지만,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을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했다는 고교 시절, “꿈도 없이, 퇴학 좀 안 시켜주나” 하다가 졸업했고,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그를 눈여겨본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그가 단독으로 연출하는 첫 창작물. “하청
일과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다”는 그는 하청 때문에 창작을 못한다기보다는 일을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여곡절 끝에 빠듯한 일정으로
작업해야만 하는 상황임에도,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의 안정된 만듦새를 끌어내고 있다.
막상 뚜껑을 연 <사이버 영혼 바스토프 레몬>은 그간 소개된 데모나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특히 슈도 등 개성있는 캐릭터가 돋보이는데,
원안에서 어떻게 달라졌나.
사이버 영혼, 레몬 향기, 네트워크 게임 같은 기본 설정은 원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애초 기획자의 컨셉은 일본에서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이 잘됐으니까 그 비슷하게 해보자는 거였다. 캐릭터도 좀더 일본만화 같았고. 그런데 KBS 방영이 결정되고 사실상 기획기간 없이 바로
제작에 들어갔고 김영두 사장님이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줬다. 그래서 설정은 유지하되 캐릭터와 콘티, 시나리오를 다 뒤집었다. 다 눈 크고, 예쁘고
잘생긴 것도 좋지만 성격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덕분에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뭐 이러냐고 욕도 먹었지만. (웃음)
레몬 게임 속 로봇들의 액션신은 매끄럽지만 좀 심심하다.
사실 리얼하게 보여주기엔 제약이 많다. 직접적으로 맞거나 베는 건 안 되니까 슬쩍 비껴간다. 슈도의 첫 전투장면만 해도 원래 검을 쓰려고 했는데,
투과광으로 바꾸라는 말을 들어서 광선검을 썼다. 개인적으로도 일상은 폭력적이지만 애니메이션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맘도 있지만. 그런 기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6시 방영인데, 아예 OVA나 개인 작업이라면 몰라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거니까.
<공각기동대> <아바론> <레인> 등 소재와 이미지가 비슷한 작품들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솔직히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 편이 아니다. <아바론>과 <레인>은 못 봤고 <공각기동대>도 다 보진 않았다.
그 작품들을 본 사람들에게 비슷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큰 부담은 없었다.
SF미스터리의 심각한 분위기에 비해 개그가 과장되게 느껴지는데, 시청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배려인가.
기본적으론 네트워크상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미스터리고, 네트워크 게임과 로봇 액션은 주시청자인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다. 전체적으로 무거우면
마니아들은 더 좋아하겠지만, 개인 작업도 아니고 26억원을 들여서 만드는 작품인데…. 너무 심각하면 만화영화가 주는 즐거움이 줄어들 것도 같고,
무거운 주제지만 일상적인 이야기로 끌고 가고자 했다.
커다란 땀방울 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차용한 개그연출이나 음향효과, 성우들의 연기는 좀 아쉽다.개그연출은 다들 좀 익숙해 있어서 원화할 때부터 이 타이밍에선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공식화된 연출방법이랄까.
그렇지 않으려면 하나하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더 해야 하는데, 일정에 쫓겨서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아쉬움도 많지만 숙제로 남겨뒀다.
복습을 잘해서 다음에 같은 문제를 틀리지 않도록 해야겠지.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