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존 포드라고 하면 웨스턴 전문감독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과 비슷하게, 빈센트 미넬리에 대해 화려하면서도 흥겨운 뮤지컬의 세계를 창조한 감독이란 점부터 거의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포드가 웨스턴의 영역을 벗어나고서도 다수의 인상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냈듯이 미넬리 역시 춤과 노래가 행복하게 어울린 그만의 우주 바깥에 발을 딛고서도 수작과 걸작들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곤 했었다.
예컨대 침울한 코미디 <신부의 아버지>(1950), 날카로운 시선의 멜로드라마 <배드 앤 뷰티풀>(1952), 정서적 감화력을 지닌 예술가영화 <열정의 랩소디>(1956) 등은 미넬리의 재능이 단지 뮤지컬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음을 보여준 영화들이었다. 이런 영화들에 비해 57년작인 <디자이닝 우먼>은 성취도 면에서 사실 다소 미진하고 따라서 미넬리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자주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미넬리의 경력과 부합하는 면이 있어 흥미롭고(미넬리는 쇼비즈니스 경력의 초창기에 세트 및 의상디자이너로 일했었다) 무엇보다도 고전적 로맨틱코미디의 귀여운 향취를 느낄 수 있어 볼 만한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신을 스포츠 저널리스트라고 소개하는 마이크(그레고리 펙)란 남자가 우리를 향해 이야기를 한다. 그는 보스턴에서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해줄 것 같더니 다른 인물에게로 이야기하기의 책임을 넘겨버린다. 그렇게 해서 그의 상대역인 마릴라(로렌 바콜)가 소개되고 유사한 방식으로 앞으로 스토리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그 밖의 인물들이 차례로 얼굴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도입부에서 그저 인물 소개의 재미있는 방식처럼만 보였던 이 말하기의 릴레이가 이후로도 지속된다는 것이다. 도입부 이후에 화면 밖에서 마이크의 내레이션이 들릴 때 우리는 그가 이 영화의 내레이터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내레이터의 위치는 마이크에서 마릴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이들 두 주인공만 아니라 다른 조연도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녀는 또 다르게 생각한다’로 풀이할 수 있는 이같은 복수의 목소리 방식을 통해 영화는 각자의 속내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충돌과 오해를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조크를 만들어내던 이 장치는 뒤로 갈수록 초반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우리의 관심에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
여하튼 <디자이닝 우먼>은 도입부에 소개된 인물들 사이의 꼬인 관계를 가지고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영화이고 그 중심에는 마이크와 마릴라라는 두 연인이 있다. 두 사람은 어느 외지에서 만나서는 급속도로 정열을 불태우고 결혼을 해버린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로맨틱코미디가 두 연인의 결합을 최종 목적지로 삼는 데 반해 <디자이닝 우먼>은 그와 반대로 결합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마이크와 마릴라는 결혼을 하긴 했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영화의 초반부, 두 사람이 사랑을 느껴갈 때 미넬리는 요트의 돛대라든가 깃대 같은 수직적 분절을 암시할 수 있는 시각적 메타포들을 가지고 그리 표나지 않으면서 미묘하게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니까 아직 두 사람은 완전한 결합을 이룬 것이 아니며 영화는 그들이 ‘결합’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것이 된다. 영화는 우선 둘의 라이프 스타일을 문제삼는다. 스포츠 저널리스트가 속한 거칠고 위험한 세계와 패션디자이너의 우아한 세계 사이에는 쉽게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영화는 마이크의 이전 교제 경력과 투철한 직업 정신에서 비롯한 위험을 이야기 전개의 중요 요소로 집어넣는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도 않고 민활함도 다소 떨어지지만 매끈하면서 유머러스한 로맨틱코미디의 길이 펼쳐진다.
장르를 따지자면 <디자이닝 우먼>은 말할 것도 없이 로맨틱코미디로 규정될 영화인데 한편으로 이것은 특이하게도 미넬리식의 뮤지컬 터치가 묻어나는 로맨틱코미디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미넬리는 뮤지컬 무대의 세계를 스토리의 일부로 끌어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컬의 안무장면에서나 썼을 법한 카메라워크를 구사하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의 몇몇 장면들에서 그는 이것이 마치 뮤지컬 시퀀스이기나 한 듯이 유연하게 카메라를 움직이며 다소 긴 호흡을 유지하면서 인물들 사이에 펼쳐지는 관계의 역학을 따라가는 것이다. 오해와 갈등, 소동이 일어나도 신경증적 증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다분히 뮤지컬적인) 이 세계에서 영화 처음에 언급되었던 소동을 가라앉히는 게 무용수라는 사실은 꽤 상징적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Designing Woman, 감독 빈센트 미넬리 출연 그레고리 펙, 로렌 바콜 1957년, 컬러, 118분 화면포맷 2.35:1 와이드스크린 오디오 돌비디지털 모노 자막 영어, 한국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중국어, 타이어 출시사 워너브러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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