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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뉴욕의 거리에 함락되다,<갱스 오브 뉴욕>
권은주 2003-10-01

<갱스 오브 뉴욕>의 헤드 카피는 이것이었다. “미국은 거리에서 태어났다.” 1620년 영국 청교도들이 광대한 미지의 땅으로부터 ‘네이티브 인디언’들을 추방한 다음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맨 뒤, 그리고 기나긴 독립전쟁을 거쳐 1783년 가까스로 ‘건국’에 성공한 젊은 나라 미국은 끊임없이 거리를 서성거리며 ‘적’들에 대항해 싸워야만 했던 전통의 흐름 속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는 건국신화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야말로 ‘길들이고 정복하여 번성하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이 그들의 삶 자체처럼 보였다(이 순간 겹쳐지는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

마틴 스코시즈는 “국가로서의 가능성을 시험받던 미국의 무정부 상태와 혼란을 영화 속에서 되살리고 싶었다. 도시의 발굴이 막 시작되는 듯한 느낌을 주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한 사회의 몰락인 동시에 그 뒤를 잇는 새로운 사회의 생성이 겹쳐지는 순간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옛것에서 새것이 출현한다는 역사관이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순진함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본다면, <갱스 오브 뉴욕>은 어찌되었든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미국 내부의 끔찍하리만치 완고한 편견과 ‘고대 로마적’ 습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비로소 근대적인 무엇에 도달하려는 순간의 격렬한 진통을 형상화하고자 시도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갱스 오브 뉴욕>의 야심은 이중으로 분열된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처럼 곳곳에 뿌리내린 하층민들의 역사’를 통해 미국의 탄생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야심과 더불어, 기록상 거의 남아 있지 않은 19세기 뉴욕의 생생한 디테일을 되살려냄으로써 박진감(迫進感)에 최대한 가깝게 이르고자 했던 미학적 야심이 종종 후자쪽으로 기우는 순간들이 훨씬 잦아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시는 이 영화처럼 거대한 세트를 짓고 촬영하진 않겠죠. 하지만 이건 정말 완벽했어요. 우린 19세기 뉴욕에 살고 있었다구요.” 마틴 스코시즈와 미술감독 단테 페레티는 몇번이고 이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마치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최대의 관건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껏 스코시즈의 미학적 야심이 그 강렬한 미장센 한복판에 존재하는 캐릭터를 향한 관객의 매혹과 고통의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어쩔 수 없는 감정이입의 엑스터시를 자아냈다면(이를테면 <분노의 주먹>이나 <카지노> <예수의 마지막 유혹> <순수의 시대>), 여기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장대하고 화려한 서사극으로서의 스펙터클이 인물을 거의 삼켜버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살자 빌을 제외한 나머지 주인공들의 제스처나 대사, 액션은 종종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한 채 스러져버린다. 어찌된 일일까?

어쩌면 이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한동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작 내내 흘러나왔던 감독과 제작자의 불화설, 감독 편집본은 2시간40분에 달하는 극장판에 비할 바 없이 길고 복잡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뉴욕이라는 공간, 더 나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기원을 소급해 올라갔던 스코시즈가 그 진정한 주인공을 확연하게 우리 눈앞에 드러내기에는 1억달러가 넘는 제작비의 압력이 지나치게 육중했던가? “뉴욕을 보여주고 싶었다. 삼류면서도 무척 매력적인 이 도시를.” 작달막한 거장은 어떤 허세도 없이 단도직입적인 말투로 이렇게 고백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보는 이를 단숨에 도취시키는 스펙터클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알고 싶어 극장으로 달려갔던 피의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섬세한 내러티브는 우리의 눈앞에서 혹은 우리 기억 속에서 그렇게 증발해버렸다.김용언 [email protected]

Gangs of New York, 2002년감독 마틴 스코시즈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카메론 디아즈, 대니얼 데이 루이스, 리암 니슨장르 드라마DVD 화면포맷 아나모픽 2.35:1오디오 돌비디지털 & DTS 5.1출시사 엔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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