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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 어르신,<고독이 몸부림칠 때> 촬영현장
박혜명 2003-09-30

큰 비가 말끔히 씻어낸 공기를 거칠 것 없이 통과해 내리쬐는 가을 땡볕이 숯불 같다. 이만큼 열받기 쉬운(?) 날씨면 사소한 꼬투리로 싸움이 커져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차에 저만치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니가 봤나? 내가 울타리 부수는 거 니가 봤냐고?” “똥인지 된장인지 묵어봐야 아나? 니가 안 뿌샀으면 타조가 뿌샀겠나? 미치도 좀 곱게 미치라, 자석아!”

이곳은 경기도 화성의 타조 농장에 차려진 <고독이 몸부림칠 때>(제작 마술피리, 제공 아이픽처스)의 오픈 세트. 바야흐로 물건리가 자랑하는 ‘물건’인 동네 앙숙 배중달(주현)과 조진봉(김무생)이 부서진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콧김을 뿜어내고 있다. 유황오리, 황소개구리 사육에 연패하고 타조 농장에 손댄 중달과, 동네 냄새난다고 타박하는 진봉의 아귀다툼은, 칸트의 산책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는 마을의 일과. 중달의 온순한 동생 중범(박영규)이 미달 아빠의 ‘장인어른 왜 이러세요’ 억양으로 “형님도 그만하세요”를 외쳐보지만 어림없다. 취재진 카메라에 반색하며 붐마이크 같은 몸통을 흔들며 달려오는 짐승들은 타조. 몸이 마음 같지 않아서 날개는 크되 날지 못하고, 유유자적하다가도 위급해지면 시속 90km로 달리는 에너지가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천방지축 노인들과 퍽이나 닮았다.

베테랑 배우들의 앙상블 코미디인 <고독이 몸부림칠 때>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소리는 “선생님”. 이수인 감독도 스탭들도, 까마득한 선배 배우들에게 “한번 더!”를 청하는 일이 가볍지만은 않은 눈치다. 이 내로라 하는 노련한 코미디언들의 애드리브를 갈무리하는 것도 감독의 과제. 기자들이 각기 인터뷰에 돌입하자 여기저기서 “연기란 말이지”, “영화란 게 말이지” 하는 가르침이 조근조근 들려온다. 하지만 젊은 스타의 반대말로만 노년의 배우를 정의하고 묻는 질문들은 ‘선생님’들을 서운하게 만들기도. 내일 촬영분 연습을 위해 스쿠터를 찾는 이주실씨의 목소리가 왠지 더 크게 들린다. 언제 고독하냐는 TV 리포터의 질문에 배우들의 눈매가 그만 잔잔해진다. “나이가 들면 고독에 거스르지 않고 익숙해지게 마련이죠. 그런데 그런 익숙함과 체념을 떨치고 다시 몸부림치는 겁니다.” 그런 어른들의 따뜻한 희극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내년 1월에 개봉한다.사진 오계옥·글 김혜리

♣ 어느 때보다 촬영이 즐거운 작품이라는 주현과,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많은 중범 역으로 색다른 연기에 도전하는 박영규.(왼쪽사진) ♣ 현장에서 더없는 신사로 존경받는 김무생. ‘액션’ 사인이 떨어지면 신사도고 뭐고 상대의 염장 지르는 대사에 몰입한다. 단체사진 찍는 순간에는 기자들에게 진지하게 “필름은 넣었고?”라고 묻기도.(오른쪽사진)

♣ 사회참여극과 부조리극을 두루 섭렵하는 연극 연출 경험을 뒤로하고 <고독이 몸부림칠 때>로 입봉하는 이수인 감독. 허랑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영화를 예고하며 10월5일 크랭크업을 앞두고 있다.(왼쪽사진) ♣ 오기민 PD는 “태풍이 일주일만 일찍 왔어도 70% 촬영분을 버릴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횟집 세트는 물론 300년 묵은 느티나무들이 뽑혔다는 소식에 송재호는 “그 근사한 나무들이 이젠 우리 영화에만 남아 있겠네”라고 감회를 토로했다.(오른쪽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