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모국어를 배우려는 재외동포들이 한국을 찾았다. 그들 대부분은 동포 2∼3세로, 한국어보다 다른 나라 말이 더 편한 사람들이다. 올해 모 대학 어학당의 한국어 초급반은 90% 이상이 동포 2세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한국어를 하지 못해도 국적을 버리지 않거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는 이들이다.
김홍경의 단편 <모국어>는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외국에 살고 있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단편에 흐르는 건 모국어를 할 줄 모른다는 슬픔이라기보다 복잡하고 낯선 어떤 감정이다.
주인공 ‘홍경이’는 70년대의 평범한 한국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아버지는 먼 나라로 일하러 떠났고, 아이와 어머니는 그가 있는 곳으로 목소리를 녹음해서 보낸다.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어머니는 “오늘은 홍경이가 노래를 배웠어요” 하면서 남편에게 어색하게 말을 건다. 아이는 매일같이 녹음기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면서 노래하고 말하고 재롱을 부린다. 이들이 녹음을 그만둔 건, 마침내 가족이 모두 모여 호주로 이민을 가면서부터였다.
5분45초의 <모국어>에는 실제 20여년 전 녹음된 작가와 어머니의 음성이 내내 등장한다. 작가는 담담한 영어 내레이션으로 가족의 역사를 읊어간다. 그에게 가장 충격적인 건 자신이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테이프의 존재는 물론, 거기서 흘러나오는 자기 목소리조차 낯설기 그지없다. 그래서일까. 엔딩 화면이 끝날 때까지 테이프의 목소리는 낯설게 부각될 뿐이다.
자칫 진부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를 <모국어>가 특별한 울림을 주는 건 작가의 담담함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느냐는 예상된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다. 정말 내가 저렇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들어봐, 저 목소리가 정말 나라니, 신기하잖아.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9년 호주로 이민간 작가는 김홍경이 아니라 ‘수잔 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모국어>는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 필름 커미션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그에게 지금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뜨거운 피를 앞세워 “나는 한국인이야”라거나 “내 정체성은 뭐지? 내 기억은 온전한 것일까?”라고 묻기보다 ‘수잔 김’의 입장에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오히려 더 많은 울림을 주는 건 왜일까. 아마도 작가의 진실한 역사가 들어 있는 탓이리라.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모국어’를 할 수 있냐 없느냐로 한국인인지 여부를 구분지으려고 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못하면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재외동포들이 더 많다. 모국어를 이미 잊어버렸거나 아예 몰랐던 이들도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심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그렇다면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외국에서 살다보면 핏줄은 갈수록 옅어지고, 모국어는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똑같이 외국에서 태어났어도 어떤 이는 한국인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아닌 것을 보면,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묶어주는 것은 “나는 한국인”이라는 정신이 아닐까. 그리고 모국어는 이 정신을 지지해주는 매우 강력한 후원자일 것이다.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