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5분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까? 잘 찾아오셨습니다. 여기가 바로 거깁니다. 성인버전 앨리스들이 젠더에 이어 뇌까지 뒤바꾸는 이상한 공간의 연속들. 거짓말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자족적인 세계를 완성한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의 ‘포털’이 바로 그곳입니다. 혹시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가 ‘이야기하기’와 더불어 ‘거짓말하기’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마도 당분간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러로 기억될 존즈와 카우프만의 세계에 입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새롭다. 무엇보다 이 재기발랄한 콤비의 두 번째 영화 <어댑테이션>과 찰리 카우프만의 또 다른 작품 <휴먼 네이처> <컨페션>까지(혹은 스파이크 존즈의 뮤직비디오 역시 포함시켜보자) 보여진 이후 그들을 특징짓는 개성이 어떤 종류인지 확연하게 드러난 다음에도 그러하다. 자기모순과 자기분열의 거대한 판타지. ‘예술은 언제나 진실만을 보여준다. 설령 거짓을 말하고 있어도’라는 명제. 이것은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의 진심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주인공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쌍둥이 형제의 도움으로 픽션에서 진실로 뛰어들거나, 방송사 PD와 CIA 요원의 이중생활을 즐기거나, (도시 속의) 자연에서 원시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물론 존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탈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내가 내 속으로 들어가 나로 가득한 세상을 엿보았을 때 느끼는 공포, “난 지옥에 갔다왔어. 결코 보면 안 될 것을 봤다구!”라고 절규하는 존 말코비치의 외침은 지금까지 나 자신이라 믿어왔던 실체를 온전히 부정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이 말코비치의 뇌에 들어왔을 때조차 말코비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기억’과 ‘무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들어앉아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볼 때 그것은 나의 눈인가 말코비치의 눈인가? 질문은 쏟아지지만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은 구질구질하게 인식론의 고전적 고뇌에 동참하지 않는다. 이제 어떤 특정 인물의 외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특징들은 의미없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포털’이다. 뇌는 입구에 불과한 것이 되며 수명이 다하는 순간 미련없이 벗어버릴 수 있는 듬성듬성한 그물망으로 제시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할 때, 이제 정말 대문자 I로서의 주체 개념은 뇌를 구성하는 수많은 포털들처럼 갈기갈기 흩어지고 부서져버린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날렵해진 주체는 단호하게 유목민의 삶을 선택하고 이제 ‘나는 곧 너다’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된다. 이 터무니없는 농담과 공상의 촘촘한 네트워킹은 단단한 현실 세계를 향해, 푸코의 적자라도 된 양 ‘철학적 웃음’으로 맞대응하며 그렇게 실존을 유희로 바꿔버린다. 어떤 의미에서 <존 말코비치 되기>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의 먼 친척뻘이다.
ps: <존 말코비치 되기>의 서플먼트는 지극히 영화와 닮아 있다 -_-; ‘7 1/2층 소개’, ‘존 말코비치: 일대기’, ‘배경 제작에 관하여’, ‘인형극 제작기술’ 등의 그럴듯한 제목에 이끌려 플레이 버튼을 누른 사람들은 십중팔구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정장을 입은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이 똘똘하고 논리정연하게 수다떠는 ‘정식’ 오디오 코멘터리였으면, 어쩐지 그들답지 않다고 느꼈을 법도 하다. 농담이야말로 그들의 진실이므로. 김용언 [email protected]
Being John Malkovich, 1999년감독 스파이크 존즈출연 존 쿠색, 카메론 디아즈, 캐서린 키너, 존 말코비치장르 코미디DVD 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오디오 돌비디지털 5.1출시사 유니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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