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을 본 아가씨, 집단의 폭력에 치를 떨다
‘거장인가 사기꾼인가.’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정말이지 나는 라스 폰 트리에를 모르겠다. 사실 내가 본 트리에의 영화라고는 <킹덤> 1, 2편과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가 전부이므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좀 우습기는 하지만 어쨌든 두 영화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다.
<킹덤>은 나에게 모뉴먼트와 같은 영화였다. 마의 100분을 지나 두 시간이 넘고, 세 시간이 지나도 극장을 뛰쳐나가지 않는 인내심과 집중력이 나에게도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넣어준 위대한 작품이었던 것이다(보통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중간에 자체적으로 휴식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타이타닉>에서 두 남녀가 선두에서 개폼 잡는 장면을 포함해 영화의 결정적 장면을 자주 놓쳐왔다). 지금이야 그 길고 길었던 내용 중에 기억나는 거라고는 음모가적인 병원장이 어두운 방 안에서 섬뜩한 얼굴을 하고 컴퓨터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가 쭉 따라가보니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나는 당시 네 시간 내내 화장실 갈 생각도 안 하고 그 공포와 혼란과 유머감각에 열광했다.
‘이랬던 그가’ <어둠 속의 댄서>에서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래도 안 울래? 이래도?’라고 부르짖는 듯, 비약과 작위로 점철된 신파에 ‘난 할리우드와는 달라’라는 식으로 시크한 척 난데없이 뮤지컬을 쑤셔넣은 꼴이라니. 정말 역겨운 농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순결서약이랍시고 요란하게 떠들어놓고 ‘아님 말고’ 하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인가.
그래서 <도그빌>을 보기 전에 심각하게 망설였다. 또다시 지지리도 인생 꼬이는 여자 이야기라니. 게다가 러닝타임 3시간이라니. 게다가 뻥 뚫린 하나의 무대라니. 아마 이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트리에를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영화를 보길 잘했다. <어둠…>처럼 찬반논쟁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그 영화처럼 이죽거리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으니까.
영화를 보면서 소설가 하성란의 단편 <파리>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직장에서 물을 먹고 시골 마을로 전출된 순경이 미쳐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한가한 마을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짝사랑하던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기괴한 공모는 그가 사랑하던 여성의 언니(이자 동료 경찰의 섹스파트너)를 성폭력의 피해자로 몰아붙이고 강제로 결혼시킨다. 평화로운 시골의 풍경과 마을 사람의 공동창작으로 짜여진 음험한 시나리오 교차 속에서 그는 환각상태에 빠져들고 파출소의 무기고를 털어 마을로 내려간다.
집단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집단이 악으로 변하는 경우는 너무나 허다해서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예닐곱살 된 아이를 집단 강간하면서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고 보도되는 10대들의 천진함은 아찔하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우리 자식이 그랬을 리 없다고 우기는 건 단지 자식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단독자로서 그들은 그저 평범한, 누군가의 아들, 딸, 학생이었을 터이다. 그들에게 잔인해질 수 있는 용기를 준 건 집단의 힘이다. 이 평온하고 고요하고 잔인하고 광기 넘치는 집단 속에서 톰이라는 캐릭터는 매우 흥미롭다. 이를테면 그는 한 사회의 지식인 집단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의 후줄그레한 일상 속에 섞이지 않으며, 언제나 윤리를 강변한다. 그는 심지어 그레이스의 유일한 구원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천박한 도그빌 무지렁이들의 차이라면 다른 남자들이 협박으로 그레이스를 강간하는 반면,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회유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나만 너랑 못 잤다고 측은하게 징징거리는 그 꼴을 보라. 그가 그레이스를 돕는 방식은 마을 사람들이 그레이스의 목에 개줄을 걸지 못하도록 싸우는 게 아니라 개목걸이에 연결된 무거운 바퀴를 끌어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가장 치명적인 방식으로 그레이스를 배신한다.
세 시간이나 되는 시간에 그것도 덜렁 텅 빈 하나의 무대 위에서, 그것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트리에는 분명 보통의 재간꾼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권선징악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아한 건 이 영화가 미국 삼부작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면 그가 나고 자란 유럽은 이러한 집단의 폭력에서 자유로운가. 엔딩에서 멋지게 흐르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는 매력적이었지만 노래가 나오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거만함은 가장 나쁜 것”이라는 영화 속 대사를 트리에 자신에게 돌려주고 싶다.
김은형/<한겨레>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