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운경 작가의 팬이다. 94년 <서울의 달>부터였으니 꼭 10년 됐다. <서울의 달> <옥이이모> <파랑새는 있다> <흐린 날에 쓴 편지>는 모두 주말극이어서 한동안 주말에 여행도 가지 못했다. 아니, 가고 싶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체세포들이 벌써 흥분하기 시작했고, 오프닝 타이틀이 뜰 때 거실 정중앙 로열석에 자리를 잡고는 CF를 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월·화드라마였던 <도둑의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도둑의 딸>이 조기종영한다는 뉴스가 날벼락이었을 뿐이다.
<서울의 달>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건, 달동네 다세대주택에 단칸방 하나씩 차지하고서는 쪼잔한 대화와 시비로 날 새던 사람들, 갓 상경한 얼빵한 촌놈(춘섭이었던가)을 진짜 촌놈보다 더 촌놈같이 연기하던 최민식, 그리고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노래를 부르며 늘 뭔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나대던 제비족 한석규가 어느 날 아침 마을 공터에서 처참하게 뭉개진 시체로 발견되던 장면이다. TV연속극치고는 예외적으로 단호한 비극적 엔딩이었다.
내 마음에 김운경의 서명을 간직하게 된 건 <옥이이모>다. 지금도 이따금씩 내 과거 어느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기분으로 떠올리게 되는 게 <옥이이모>다. <용의 눈물>이나 <모래시계>도 열심히 보았지만, 사극이나 정치드라마의 뻔한 통속성과 무모한 과장법에 헛배 불렀다가는, 드라마에 대한 애정도 종영과 함께 깨끗이 종 쳤다. ‘샘’의 원조인 선생님 정종준과 어떤 때는 2회씩이나 계속되던 그 ‘구라’에 넋을 놓던 아이들, 앞니가 빠져 바람이 쉭쉭 새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니, 그거 아나’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던 풀빵 장수 주현과 밑바닥 청춘들, 색시집 주인 권기선과 아가씨들(<장군의 아들>의 꽃 송채환이 퍼런 아이섀도가 벙벙하게 번진 채 껌을 짝짝 씹으면서 그렇게 무너졌지만 나는 <옥이이모>에서 송채환이 가장 빛났다고 생각한다), <옥이이모>의 모든 우수마발(牛수馬勃) 즉 소오줌말똥 같이 보잘것없는, 그러나 각기 나름의 삶의 이유와 명분과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던 그 인물들은, 김운경 같은 그릇에서만 빚어질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서울의 달> <옥이이모>가 나만의 컬트는 아니었다. 당시 시청률 최고의 드라마였으니까.
이번의 MBC 주말극 <죽도록 사랑해>도 전형적인 김운경표 드라마다. ‘떼 조연’들의 파노라마도 여전했다. <옥이이모>는 옥이이모에게 애인이 생기거나 남편이 죽거나 하는 아무런 특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도 몇회씩이나 구김살 없이 흘러가곤 했지만, <죽도록 사랑해>의 재섭은 늘 삼각관계 같은 감정적인 센세이션의 중심에 있으면서 비교적 여타의 TV 멜로 주인공들처럼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좀더 대중적인 드라마 얼개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청률은 KBS 주말극에 ‘하프 스코어’ 이하로 밀리면서 내내 10%선상을 오르내렸다. 대중은 처음부터 그다지 이 드라마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령 ‘여자에게 강간당해서 할 수 없이 결혼한 남자 이야기’라거나 ‘옥탑방의 혼전 동거 남녀 이야기’라거나 하는 식으로 요즘 대중의 안테나를 곧장 건드는 어떤 코드가 없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도 10년에 한번씩은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던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결혼생활이 신혼을 지나 권태기가 찾아오는 것과 순서가 같다. 95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김운경씨는 “한번 시대극을 써보고 싶다”고 했고 “왕 같은 사람은 나오지도 않는 철저히 민중만 나오는 사극”을 써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 지금, 리모델링이 필요한 시점이라면 김운경 작가 자신도 아마 여러 가지 설계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장기근속 김운경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죽도록 사랑해> 방영 중에는 태도가 좀 불량했다. 드라마는 압도적으로 좋은데, 걸핏하면 빼먹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면서도 김운경 드라마의 시청률이 잘 안 나온다는 얘길 들으면 공연히 내가 좌절했다. 이토록 냉담한 대중 앞에 서 있다니, 신인 소설가로서 의욕이 안 나네, 라고 중얼대면서. 조선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