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채 쓰러뜨려야 할 상대를 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두 주먹을 움켜쥔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며 가장 본능에 가까운 행위… 인간이 두 다리로 섰을 때 이미 권투의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아다치 미쓰루의 <카츠>)
80년대까지 권투가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던 것은, 바로 그 권투의 원초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요즘 권투의 인기는 바닥이지만, 가장 원초적인 권투의 매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권투만화를 꼽는다면, 이론(異論)없이 <내일의 죠>다. <거인의 별>의 스토리를 썼던 작가 다카모리 아사오와 치바 데쓰야 합작으로 1968년 연재가 시작된 <내일의 죠>는 1973년 죠의 죽음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당대의 청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아원 출신의 야부키 죠는 권위와 질서를 내세우는 기성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권투를 택했다. 그는 팔을 내리고 흠씬 두들겨맞다가 한방의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눕힌다. 모진 주먹과 욕설을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승리한다. 죠를 응원하는 사람, 죠의 주변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의리있는 하층민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무방비로 얻어맞는 사람들이고, 죠의 권투는 바로 그들을 대변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투사들이, 야부키 죠가 그들의 대변자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전공투 투쟁의 고비였던 ‘도쿄대 야스다강당 사건’이 끝난 뒤, 학생들이 점거했던 야스다강당 벽에는 그들의 신념과 이상을 적어넣은 글들이 가득했다. 거기에 ‘우리는 내일의 죠다’,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 꿇지 않는다’란 말이 있었다. 죠는 근성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적개심도 있다. 그가 싸우는 것은 일종의 의사 표현이었다. 싸우지 않으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죠는 권투를 한다. 맞아도 맞아도 굽히지 않고 거대한 적에게 끝까지 달려드는 죠의 모습이, 정부에 항거하는 자신들의 불굴의 의지와 같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번에 나온 <내일의 죠>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극장판이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리키이시가 죽은 뒤 링을 떠났던 죠는 1년 뒤 다시 권투를 시작한다. 죠의 인생에는 오로지 권투만이 있다. 그의 인생에는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여인들이 그의 곁을 맴돌아도, 죠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죠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챔피언인 호세 멘도사와 마지막 시합을 벌인 뒤, 죠는 되뇐다. “모두 불태웠어. 새하얗게. 새하얀 재만 남을 때까지.” 링포스트의 의자에 앉은 죠는 온통 피가 묻은 글러브를 풀어 요코에게 준다.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며. 그리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세상을 하직한다. 죠의 인생 그 자체였던 링 위에서. 이 장면은, 일본 만화 사상 최고의 마지막회로 꼽히기도 한다. DVD로 나온 <내일의 죠>가 가장 반가운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죠의 마지막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
<내일의 죠>가 60년대의 상징이 된 이유 하나는, 민중적인 내용과 함께 불꽃처럼 타오른 당대의 ‘싸우는’ 인간형을 압도적인 박력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81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일의 죠>의 감독을 맡은 데자키 오사무는 안정된 연출력이라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죠가 링에 복귀한 뒤 호세 멘도사에게 도전할 때까지의 다사다난한 과정을, 데자키 오사무는 질풍처럼 달려간다. 리키이시를 죽였다는 자책감 때문에 안면을 치지 못하던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이나 무관의 제왕 카를로스와의 우정과 시합 등이 빠르게 진행된다. 극장판 <내일의 죠>는, 관객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진행된다. <내일의 죠>는 핵심만을 보여주면서, 죠의 불타오르는 싸움에 집중한다.
빛이나 강물의 묘사 등 기술적인 면에서도 <내일의 죠>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도저히 20년 전의 애니메이션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주제가는 전형적인 80년대 풍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동작을 멈추어 한장의 그림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기법은 시합장면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죠의 ‘열혈’을, <내일의 죠> 극장판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김봉석/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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