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지하 터널을 무대로 육중한 스피드와 호쾌한 액션을 선보이는 <튜브>의 실제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튜브, 지하철이다. 애초에 2호선 지하철을 모델로 시나리오가 완성됐으나, 제작단계에서 최신 모델인 7호선 신형으로 바뀌었다. 극의 전개상 서울시를 벗어나지 않고 빙글빙글 순회하는 노선이어야 하는데다 클라이맥스신에 해당하는 잠실철교 붕괴와 한강 폭파 에피소드도 2호선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하지만 연한 아이보리 바탕에 녹색선을 두른 2호선이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 되기엔 역부족이었을까. 황인준(36) 미술감독의 제안으로 가볍고 단단한 알루미늄 재질을 날렵하게 두르고 세련된 모양새를 자랑하는 7호선이 낙점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끼리 보더라도 2호선을 무대로 스피디한 액션을 선보이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고, 외국에서도 볼 텐데 이른바 폼도 안 나는 지하철을 모델로 하기 탐탁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폼나는 화면을 위해 일단 폼나는 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백운학 감독은 결정을 위해 3일의 시간을 요청한 뒤 미련없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어차피 지하통로를 빽빽이 연결하는 지선을 가정하자면 노선이 조금 헷갈리는 것은 관객이 알아서 이해해줄 것이고, 러닝타임의 80%를 차지하는 지하철 격투신을 위해서 좀더 모양새 있는 모델로 바꾸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렇게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 황인준은 그게 프로덕션디자이너로서 미술감독이 해야 할 일이고,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토로한다.
영화가 개봉된 뒤 가장 많이 듣는 찬사는 아무래도 ‘지하철 세트가 완벽하다’는 말. 그의 이력을 훑어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 정도는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성싶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동기인 민병천 감독과 <유령>으로 충무로 데뷔식을 치르고, 이어 <반칙왕>의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내민 그는 한동안 집어드는 시나리오마다 엎어지는 곤욕을 치렀다. 심리적 침체기를 거치는 동안 <튜브> <복수는 나의 것> 등의 시나리오가 들어왔고, ‘더 배워야 한다, 제대로 굴러야 한다, 그러려면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액션 대작 <튜브>를 선택했다.
배우의 캐스팅 난제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몇번 휘청거렸지만, 기특하게도 살아난 <튜브>는 마치 극중 주인공의 운명을 보는 듯하다. 블록버스터 기근의 독한 상황이지만, 관객의 마음을 적시는 촉촉한 액션의 운명은 그리 어두워 보이지만 않는 것은 스탭들의 오기와 실력 때문이다. 황인준으로서는 내러티브와 비주얼의 절묘한 합일을 이뤄낸, 섭섭지 않은 세 번째 필모그래피기도 하다.글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
프로필
→ 1968년생→ 홍익대 시각디자인 전공→ 월간 영화잡지 <키노>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1년 반 동안 활동→ 동기 민병천 감독과 단편작업 및 뮤직비디오(스페이스 A의 <주홍글씨>015B의 ) 촬영 뒤 <유령>으로 미술감독 데뷔→ <반칙왕> <튜브>의 미술감독·현재 <소금인형>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