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에 제작됐다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현재 필름조차 보존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요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영화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두용 감독의 손끝에서 70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아리랑>을 보면, 왠지 이건 원작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영화일 거라는 예감이 온다. 구성지고 넉넉한 변사의 입담을 따라 막이 열리면, 식민지의 고달픈 살림살이가 한땀 한땀 아프게 수놓아지고, 서러운 민심은 민요 <아리랑>을 타고 골목 어귀, 동구 밖 넘어 고갯길로 흘러 넘어간다. 이두용 감독과 이미 여러 작품을 함께한 바 있는 최창권 음악감독은 95년 이 감독의 <위대한 헌터 GJ>를 끝내면서 한동안 영화음악과 멀어져 있었다. 약해진 심장을 수술한 뒤 다시 억눌린 척추신경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에게 일거리는 소원해졌지만, 재기의 기회가 온 건 또다시 이 감독에서였다. 무려 일곱해를 떠나 있던 현장이었지만, 최 감독의 악상은 조금도 어눌해지지 않았다. 극중 주연인 영진, 현구, 영희, 명순의 테마를 일일이 작곡하고, 극에 어울리는 오케스트레이션을 위해 수십년간 함께해온 음악지기들을 녹음에 참여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음악을 들으며, 처음엔 그의 실력을 의심했던 젊은 스탭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보냈다. 영화는 남한보다 북한에서 먼저 선을 보였는데, 웬만한 남한 음악에는 잘 동조하지 않는 북의 관객은 최 감독의 음악은 친숙한 표정으로 반겼다. 그만큼 귀에 낯설지 않은 우리의 가락인데다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에 익숙한 북한의 분위기도 작용했다. 북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린 <아리랑>은 원래 <매트릭스> 개봉일에 맞춰 남한에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강력한 블록버스터의 위력에 밀린 탓인지 30일로 개봉이 미뤄진 상태다. 한동안 복고바람을 일으키던 영화들의 틈새에서 옛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아리랑>의 리듬이 살아날 수 있을지 최 감독은 기대 반 우려 반 심정이다.
17살에 북에서 넘어와 스스로 작곡 연습을 하다, 서른살 무렵 태현실이 주연을 맡은 <영광의 블루스>의 음악을 맡으면서 최 감독은 영화와 처음 조우했다. 그 이후 <로버트 태권브이>의 주제곡을 만들고(노래는 최 감독의 둘째아들 최호섭씨가 불렀다), 80여편에 이르는 뮤지컬과 몇편의 무용곡을 맡으면서도 영화와는 인연의 끈이 쉽게 닿지 않았다. 부인의 적극적인 홍보에 힘입어 70, 80년대 <야성의 처녀> 등을 거쳐 90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지금은 그의 세 아들들이 아버지의 음악업을 물려받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글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 조석환 [email protected]
프로필
→ 1934년생.→ <아리랑>(2002) <위대한 헌터 GJ>(1995) <뽕>(1985) <꾸러기 발명왕> (1984) (1984) <야성의 처녀>(1980) <고교얄개>(1976) <로보트 태권브이>(1976) (1971) 등 영화음악 서른편→ 각종 뮤지컬 80여편, 무용곡 등 작곡